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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2월7일 ‘박종철군 추도대회’에 참석하고자 서울로 가려다 부산역에서 경찰에 이끌려 되돌아온 박군의 어머니 정차순씨와 누나 은숙씨가 부산 괴정동 사리암에서 종을 치고 있다. 전국에서 동시에 박군의 만 나이 스물한 번을 타종하기로 한 이날 모녀는 “철아, 이 종소리 듣고 깨어나거라”라고 울부짖으며 종을 치고 또 쳤다. <보도사진연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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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35
1987년 1월19일. ‘박종철군 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준비위원회는 2월7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추도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추도회 참가요령은 “오후 2시 각자의 위치에서 추도 묵념을 올린다”, “검은색 또는 흰색 리본을 단다”, “모든 자동차는 2시 정각에 추도 경적을 울린다” 등이었다. 슬로건은 “고문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로 결정했다. 추도회 준비위원은 무려 6만명이 훨씬 넘었다.
전두환 정권은 추도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원천봉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2·7 작전’을 통해 전국의 경찰 12만명 중 5만여명을 동원했다. 사상 최대 규모였다. 전국에서 검문검색과 압수수색, 가택연금 등이 이뤄졌다. 명동성당 주변의 버스 정류소는 모두 폐쇄해 시민들의 참여를 가로막았다.
2월7일 오후 2시. 명동성당에서 21번의 종이 울렸다. 박종철의 만 나이에 맞춘 타종이었다. 신부들과 800여명의 시민, 학생들이 미사에 참석했다.
학생과 시민 들은 도처에서 명동성당을 향해 행진했지만 최루탄 발사와 해산작전으로 흩어져 곳곳에서 무리를 지으며 시위를 벌였다. 여러 장소에서 거리 추도회가 열렸다. 경찰은 시민들이 묵념하는 도중에도 최루탄을 무차별적으로 발사했다.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저항했다.
시민들은 자동차 안에서 경적을 울렸고, 시위대를 향해선 응원의 박수를, 경찰들을 향해선 ‘우~’ 하고 야유를 보냈다. 경찰이 학생들을 연행하면 항의했고, 어떤 시민들은 경찰과 싸워 학생을 구출해냈다. 시위대는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을 불렀다. 시위대를 향한 시민들의 지지는 이전의 시위와 달라진 풍경이었다.
시위는 저녁 8시까지 이어졌다. 이날 추도집회는 서울·부산·대전·광주·마산·전주 등 전국에 걸쳐 열렸고, 798명이 연행되었다.
추도회가 열리는 날까지 박정기의 집엔 조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2월7일 오전, 아내 정차순과 딸 은숙은 명동성당 추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어머니들을 통해 집회에 꼭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뒤였다. 맏이 박종부도 추도회엔 꼭 참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1월15일 이후 은숙은 어머니 정차순 옆을 지켰다. 모녀가 추도회에 참석하자면 기관원들의 미행을 따돌려야 했다.
골목을 걷는 모녀의 차림은 허름했다. 두 사람의 가방엔 여벌의 옷이 들어 있었다. 은숙은 목욕탕에 들어서며 뒤를 살폈다. 형사들이 멀찌감치서 걸음을 멈추었다. 목욕탕에 들어선 모녀는 신속하게 옷을 갈아입고, 사위를 살피며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가까운 정류장으로 향했다.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아무 버스나 잡아탔다. 시내버스를 몇 번 갈아탄 모녀는 1시간쯤 뒤 부산역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부산역 광장을 가로질러 힘껏 뛰었다. 역사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들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앞에 형사들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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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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