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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7월 법정소란 혐의로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된 박정기씨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듬해 1월14일 박종철 5주기 추모 촛불행진이 경찰에 저지당하자 행렬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는 박정기씨.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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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아들보다 두 살 많은 아버지 90
1991년 7월 자진출두해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된 박정기는 재소자들과 가깝게 지냈지만 유독 ‘감방의 왕초’ 김남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문익환 목사에 대한 김남의 발언이 그의 심사를 건드렸다. “빨갱이 목사 아닙니까? 선량한 학생들 선동하고 김일성을 찾아간 불순분자이지 그 사람이 무슨 목사예요?” 박정기는 문 목사에 대한 험담을 지나칠 수 없었다. 문익환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이였고, 유일하게 닮고 싶은 인물이었다. “문 목사님이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게요? 한평생 독재에 저항하고 분단을 극복하는 데 몸 바쳐 싸운 분입니다. 같은 민족인 북한을 방문한 게 무슨 죄입니까? 또 한번 문 목사님을 함부로 입에 올리면 그때는 사생결단을 내고 말겠소.” 박정기가 왕초에게 따지고 들자 재소자들이 모두 놀랐다. 그가 재소자에게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박정기와 가까운 ‘정 박사’가 말렸다. “박 선생, 고정하십시오. 김씨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박 선생에게 사과하세요.” 보수적인 크리스천인 김남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여러 차례 부딪혔다. 박정기가 배정받은 감방은 60살 이상의 경제사범을 수감한 ‘경제방’이었다. ‘경제방’이라지만 재벌이나 사장급은 없고, 대부분 빚을 갚지 못해 잡혀 들어온 잡범들이었다. 감방에서 박정기가 가장 가깝게 지낸 이는 정 박사였다. 그는 유명한 소매치기범으로, 매사에 모르는 게 없어 별명이 ‘박사’였다. 그는 일제 때 만주부터 돌아다니지 않은 데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배운 도둑질을 끊지 못하고 징역을 살고 있었다. 박정기가 자리잡은 화장실 앞 자리는 인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름이라 변기 뚜껑 틈으로 구더기도 끊임없이 기어나와 몸에 엉겨붙었다. 박정기는 걸레를 찾았다.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들을 리 없는 그였다. 화장실과 감방을 걸레질하다 보니 어느새 양동이의 물 한 통을 다 썼다. 물이 모자라 교도관을 불러 사방문을 따게 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규정상 안 됩니다. 물은 아침·점심·저녁 때만 뜰 수 있어요.” 박정기는 쇠문을 걷어차며 항의했다. 경비교도대가 출동했다. 주임교도관이 말했다. “박 선생님, 왜 그러십니까?” “물을 떠오려는데 왜 문을 따주지 않습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규정에 없는 일이라 주임이 곤혹스러워했다. 며칠 동안 소란을 피우자 교도소 쪽에서 손을 들었다. 이후 박정기는 어느 때든 감방을 출입할 수 있었다. 출입이 자유로워지자 감방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일과 주변 재소자들의 요구를 해결하는 일을 떠맡았다. 박정기는 교도소의 규칙에 개의치 않았다. 목욕 시간은 10분을 넘기면 교도관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쫓아냈다. 여든 안팎의 노인 재소자들을 목욕시키는 일을 맡은 그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등을 밀어드렸다. 운동 시간은 30분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무시했고, 정해진 구역을 벗어나 시국사범들의 감방에 가서 얘길 나누다 오곤 했다. 옆 감방엔 다리를 잃은 장애인이 여럿 있었다. 장애인들을 배려하지 않는 건물 구조라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박정기는 그들을 목욕시키고 병동에서 치료를 돕기도 했다. 구치소 안에서도 그는 하루 한시도 허투루 살 수 없었다. 그에게 감옥살이는 아들과 새롭게 동지가 되는 과정이었다. 면회객들이 찾아와 그의 옥살이를 걱정했지만 마음이 편안했다. 아들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가협에선 주로 박래군과 정미경이 면회를 왔다. 그는 두 사람이 올 때마다 대답했다. “구치소가 아주 편안하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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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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