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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3월12일 필자는 남북대화사무국에서 통일관계장관 전략회의를 소집해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에 대한 긴급대책을 논의했다. 왼쪽부터 권영해 국방장관, 필자,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뒷쪽), 박관용 비서실장 등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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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1
1993년 3월11일 봄기운은 완연한데, 남북관계는 여전히 두터운 냉전의 빙벽으로 막혀 있었다. 이인모씨의 북송 허용이 긴 냉전의 겨울을 깨고 평화의 봄을 알리는 소식으로 되돌아올까. 이런 꿈같은 생각을 비웃는 듯, 바로 다음날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3월12일은 개인적으로 결혼 27돌 기념일이기도 했다. 그간 고생한 아내에게 봄옷이나 한벌 사입으라고 돈을 주었다. 아내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나 역시 기분 좋게 청사로 출근했다. 그런데 오전 10시 반쯤 북한의 탈퇴 소식이 들어왔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나? 북한이 그토록 끈질기게 요구해온 이씨의 송환을 새 정부가 아무런 조건 없이 허용했는데 발표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찬벼락을 쏟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북한의 결정은 전날 우리의 발표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한 오비이락으로 보지 않는 주변 사정을 생각할 때 비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 주석이 강경한 군부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리고 김영삼 정부의 통일정책이 앞으로 순탄치 않을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침착하고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그날 낮 한승주 외무장관과 점심을 먹으면서 어제 발표한 이씨 북송과 오늘 나온 북의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선언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도 동의하는 듯했다. 나는 북의 태도를 면밀히 주시했다. 탈퇴 발표와 함께 나온 북한 총리의 팀스피릿 한-미 합동 군사훈련에 대한 비난은 퍽 강경했다. 그러나 5분 뒤에 나온 북의 공식 입장은 조금 더 유연했다. 특히 한반도 비핵화 선언의 정신은 계속 지켜나가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뒤에서 조종한다고 비난해온 미국을 일차적으로 겨냥한 것이지 남쪽과 대화 통로를 차단하려는 것은 아님을 에둘러 밝히는 듯했다. 이어 오후 5시40분께 나는 남북회담 사무국에서 통일관계장관 전략회의를 소집했다. 김덕 안기부장은 내가 이 회의를 기자들에게 알렸다고 불편해했다. 과거 이런 긴급 상황은 거의 예외 없이 안가의 밀실에서 논의해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새 정부에서 새롭게 안보 관련 문제들을 다룰 수 있고 다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술 더 떠 박관용 비서실장은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평양 당국이 (우리의) 뺨을 때린 행위’라며 소리치며 격분했다. 그는 핵확산금지조약 탈퇴 결정을 이씨 북송에 대한 북의 공식 반응이라고 속단했다. 남북기본합의서가 무효화되었다며 남북한 비핵화 선언마저도 무효라고 성급하게 말했다. 그러자 한승주 외무장관이 차분한 목소리로 “그건 아닌데요”라고 반론을 폈다. 나는 이런 때일수록 비정상적 체제의 비정상적 국가 행위에 대해 정상적이고 합리적으로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소신을 분명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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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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