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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07 20:02 수정 : 2012.06.07 20:02

1993년 4월15일치 주요 일간지에는 ‘민자당 최형우 사무총장의 전격 사퇴’ 기사가 1면을 장식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 실세 중의 한 명인 그의 갑작스런 퇴장은 새 정부의 개혁에 불안한 기류 변화를 예고했다.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9

1993년 4월 들어 차관급 이상 국무위원에 대한 첫 재산공개 여파로 나라가 시끄러웠다. 2월27일 취임 첫 국무회의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재산을 공개한 이래 ‘유전무죄 유력무죄’이던 세상에서, 갑자기 ‘유전유죄’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공직자가 부동산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정죄당하는 새로운 현실에 국민들은 통쾌해하는 것 같았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 윗물맑기운동은 의식의 개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현실로 다가왔다. 지난날 한국에서는 ‘장관 자리 일년만 하면 평생 먹을 것 걱정 없다’고 할 만큼 명예와 부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특권 집중 현상이 끝장나는 것 같았다. 아니, 이젠 끝장나야 했다. 김 대통령은 무서운 힘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남북관계에서는 그 개혁 바람이 힘을 쓰지 못하고 해묵은 긴장만 높아지는 것 같았다. 오히려 삭풍이 불어닥칠 조짐이었다.

4월 중순께 집권 민자당의 사무총장인 최형우씨가 아들의 부정입학 사건으로 물러났다. 김 대통령도 무척 아쉬워했다. “우째 이런 일이”라는 투박한 부산 사투리에는 안타까움이 깊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개혁의 대세를 대통령도 거스를 수 없었다. 정말로 개혁은 혁명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개혁이 이리도 어려운데, 여전히 이 땅에 깊이 박혀 있는 비민주적 보수세력의 간교하고 끈질긴 저항을 이겨낼 수 있을까? 과연 대통령의 개혁과 평화 의지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든든한가? 대통령 주변 인물들도 그러한가?’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한가닥 불안이 스멀스멀 나를 덮쳐오는 듯했다.

그즈음 언론에서는 ‘신한국 창조’를 이끄는 새 정부의 실세에 대한 추측성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를 새 정부의 ‘실세’ 또는 ‘개혁 전도사’로 부각시키려 했다. 일종의 적신호였다. 위기 상황에도 당당하게 대응하고 처신한다고 치켜세우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내가 곤경에 빠지도록 유도하는 언론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4월5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윤호미 <조선일보> 기자의 ‘조선 인터뷰’ 대담에 응했다. 지난 2월말 취임 기자간담회 때 나는 “부총리로서 처음 맞은 일요일 교회에 가서 ‘제발 내가 변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그 말이 “혹시 평소의 주장에 변화가 올까봐 하신 말씀이 아니냐”고 물었다. 나는 소신대로 얘기했다. “사람은 변하기 쉽고 교만해지기 쉬운 존재다. 장관이 되면서 학자 시절 품었던 소중한 가치와 꿈, 비전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권력을 탐닉할 수 있다. 내가 그렇게 변질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이는 비판세력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이기도 했다.

이어 냉전세력의 불안감을 반영하는 질문이 계속됐다. 재야와 야당에서 반대하는 보안법에 새 정부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물었다. “보안법 문제는 야당 쪽 의견도 듣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원에 와서 보니, 남북교류협력법이 보안법에 우선한다는 조항이 있어서 남북교류에 관한 한 보안법의 구속력은 거의 상실된 상태더군요.”

한완상 전 부총리
사실 이렇게 대답하기는 쉽지 않았다. 가뜩이나 기세등등한 보수세력에게 무모한 도전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부 안팎에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 제3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나조차도 입각하기 전에는 몰랐다. “제3조(다른 법률과의 관계) 남한과 북한과의 왕래·교역·협력사업 및 통신 역무의 제공 등 남북교류와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에 관하여는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 다른 법률에 우선하여 이 법을 적용한다.” 여기서 ‘다른 법률’의 범주에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도 포함된다. 사실 남북교류협력 전반에 걸쳐 이 두 법이 법적 정치적 재갈을 물려왔던 사실을 고려하면, 제3조의 조항은 이미 탈냉전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대담의 마지막 질문은 김영삼의 개혁, 특히 윗물맑기운동의 다음 단계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저는 요즘의 윗물맑기 개혁 작업을 보면서 정치의 정통성이 얼마나 힘있고 무서운가를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김 대통령의 한국병 치유의 가장 강력한 처방과 의지라 할 수 있는 부정부패 추방과 사회기강 확립 작업이 국민들의 호응 속에서 바른 길로 나아가리라 확신합니다.”

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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