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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3월 홍콩에서 열린 시엔엔(CNN)의 ‘아시아 위성방송대회’에 초청받은 필자는 테드 터너 회장을 만나 아시아거점을 서울에 두는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사진은 메이저리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구단주이기도 한 터너(왼쪽) 회장이 세번째 부인인 배우 제인 폰다(오른쪽)와 2001년 이혼하기 전 야구경기장에서 함께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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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68
1994년 3월20일께 다국적 케이블 뉴스 채널인 <시엔엔>(CNN)의 소유주인 테드 터너로부터 종합유선방송위원장 앞으로 초청장이 날아왔다. 그때 시엔엔은 명실공히 전세계 뉴스를 담당하고자 아시아 거점으로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다가 홍콩에 아시아 프런트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터너 회장이 아시아 주요 나라의 케이블 방송 책임자를 홍콩으로 초청한 것이었다. 그는 아시아를 21세기 역사의 주요 축으로 이미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호기심을 안고 홍콩으로 날아갔다. 테드 터너는 누구인가? 그는 보수 이데올로기로 세계 언론을 장악하고 지구촌을 호령하고 싶어 하는 루퍼트 머독과 정반대되는 언론 기업인이다. 그는 또 호방한 협객의 기질도 지녀 97년 미국의 보수정권에서 유엔에 국가 분담금을 내지 않아 운영이 어려워졌을 때 개인적으로 10억달러(약 1조2천억원)의 거금을 쾌척해 유엔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명배우 헨리 폰다의 딸인 그의 아내 제인 폰다도 배우이자 인권·여성 운동가로 유명하다. 나 개인적으로는 그가 메이저리그의 명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구단주란 점이 친밀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60년대 애틀랜타에 있는 에모리대 대학원에서 5년간 유학할 때, 주말이면 때때로 브레이브스의 야구 경기를 보러 갔다. ‘홈런왕’ 행크 에런, 뚝심 좋은 포수 조 토리, 제비처럼 빠른 펠리페 알로우가 활약하던 시절이었다. 행크 에런의 홈런이 터지는 순간이면, 나는 모든 스트레스가 그 공과 함께 사라지는 듯한 쾌감을 느끼곤 했다. 3월21일 저녁 리셉션장인 홍콩 샹그리라 호텔에 나는 좀 일찍 갔다. 마침 안면이 있는 존슨 부사장을 만나 얘기를 하고 있는데 입구 쪽에서 키가 훤칠하게 큰 남녀가 정답게 손잡고 들어왔다. 터너 회장 부부였다. 웃으며 가볍게 악수를 하며 지나치는 그에게 “나는 브레이브스의 열렬한 팬이기도 합니다. 행크 에런, 조 토리, 펠리페 알로우 모두 내 영웅들이죠”라고 말을 걸었다. 그러자 역시나 그는 걸음을 멈추고 관심을 보였다. 그 순간 흐뭇하게 웃는 그에게 다소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다. “시엔엔이 아시아의 교두보를 마련한 것은 잘한 일이지요. 아시아는 워낙 다원적이고 광활한 지역이지만, 경제·정치·문화적 힘은 동북아시아에 집중되어 있어요. 중국·한국·일본은 모두 한자와 유교 문화권에 속하지요. 그 가운데 한국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중국과 일본 중간에 있어 두 나라 사이에 교량 구실을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서울도 시엔엔의 아시아 교두보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데, 본사에서는 그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그러자 터너 곁에 서 있던 부사장이 대신 답했다. 그는 물론 도쿄·베이징과 함께 서울에도 직접 와서 타진을 해보았다며, 세 가지 이유로 홍콩에 뒤졌다고 했다. 첫째, 서울의 교통이 너무 번잡해 일하기에 능률이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의 지적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로, 서울 거리에서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그 말도 맞는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했다. 그런데 셋째 이유를 듣고서는 내 얼굴이 슬며시 빨개졌다. 존슨은 직접 체험한 한국 공무원들의 고압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자세를 지적했다. “그런 일이면 이런 조건, 저런 조건을 다 갖추어 가지고 와야 한다”며 처음부터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도와주기는커녕 귀찮게 하지 말라는 자세라고 했다. 홍콩의 관리들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What can I do for you) 자세라면 한국 관리들은 “당신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난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다”(I cannot do for you unless…)는 식이라고 했다. 존슨의 날카로운 관찰 사례를 함께 들으며 터너 회장은 잔잔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나는 부끄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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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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