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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월26일, 지난 대선 패배 직후 정계은퇴를 선언한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가 영국 연수차 출국에 앞서 김포공항에서 환송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당시 필자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김 총재를 상임 정치고문으로 포용하라는 제안을 했으나 거부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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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04
1996년 8월30일 정말 오랜만에 김대중 총재와 만났다. 김 총재의 정치담당 특보를 거쳐 지난 4월 15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새정치국민회의)으로 당선된 길승흠 전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가 주선한 자리였다. 김 총재는 문민정부가 남북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대일관계와 대미관계마저 악화시켰다고 개탄했다. 나는 남북간에 적대적 공생관계의 현실을 지적하며 염려했다. 그도 동의했다. 사실 남북관계, 통일과 평화 정책에 관한 한 나는 와이에스보다 디제이의 비전에 훨씬 더 가깝다. 그래도 문민정부 초기 나는 와이에스와의 그 거리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낙관했다. 취임사는 물론이고 이인모 노인 송환 건의 때까지 나는 그의 과감한 정책 결단에 놀랄 정도였다. 그런데 북핵문제 이후 지금은 문민정부가 노태우정권 때보다 더 수구냉전적 대북정책을 과감하게 펼치고 있다. 이런 때 김 총재와 만나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 어떤 정책적 비전을 펼쳐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김 총재와 대화를 마친 뒤 나는 김광일 청와대 비서실장을 만나 남북 정상 사이에 오해와 불신을 해소하는 방책으로 정상들이 신임하는 밀사 또는 특사끼리 소통의 문을 열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 실장은 그동안 정재문 의원(신한국당)과 장치혁 고려합섬 회장 등이 접촉을 했으나 북한 쪽에서 그들을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평양 당국이 두 사람을 김 대통령의 심부름을 할 수 있는 인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허나 그것은 평양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보내달라는 뜻일 수도 있으니 계속 이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해볼 것을 나는 제안했다. 9월2일 방송대가 케이블 텔레비전 ‘채널 47’을 받아 방송을 개시하는 행사를 끝내고 저녁에는 김덕룡 정무장관, 현승일 국민대 총장과 함께 했다. 다음 대통령은 비경상도인으로서 민주화와 정치개혁에 헌신한 인물 중에서 나와야 한다는 데 우리는 대체로 동의했다. 특히 김 장관은 최형우 의원과 연대를 강화해서 이런 방향으로 역사가 흘러가게 해야 한다고 나는 강조했다. 이런 얘기를 나누면서 나는 문민정부 출범 초기 김 대통령에게 김대중 총재를 껴안고 가자고 제의했던 사실을 새삼 떠올렸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 런던으로 자진 유배를 가 있던 ‘디제이’를 대통령의 정치상임고문으로 모시게 되면 민주세력을 대동단결시키는 효과뿐만 아니라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감정 정치도 극복해내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나는 확신했다. 그러나 나의 제언은 김 대통령의 한마디 엄명으로 묵살되고 말았다. “좋은 점이든 나쁜 점이든 다시는 내 앞에서 디제이 얘기는 하지 마시오.” 9월5일. 방송대에 출입하는 안기부 요원 권아무개가 찾아와서는 지난달 30일 길승흠 의원과 함께 김대중 총재를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물었다. 불쾌했다. 지금이 군사독재시절인가. 게다가 문민정부가 디제이를 그렇게 두려워하는 데 놀랐다. 참으로 한심하다. 와이에스가 지난 대선에서 투표로는 디제이를 이겼지만, 실상 정치적으로는 이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진정한 승자라면 이렇게 옹졸하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84년 초가을 3년 만에 미국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했을 때도 안기부 요원이 김포공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딱 한가지만 물었다. “앞으로 디제이와 어떤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 그때 나는 딱 떨어지게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디제이와 거리를 두기를 원한다면, 디제이가 완전히 자유롭게 정치활동을 하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계속 디제이를 억압하고 차별한다면 나는 항상 디제이 곁에서 그를 도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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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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