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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가을 필자는 <한국방송>의 고향 답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을 계기로 ‘6·25’ 등 가장 민감한 청소년 시절을 보냈던 경북 김천을 찾아 회상에 잠겼다. 사진은 50년 여름 한국전쟁의 포화로 파괴된 김천시가지의 참상이다. <김천초교 백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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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05
1996년 9월26일 <한국방송>의 ‘신한국기행’ 프로그램을 찍기 위해 경북 김천으로 내려갔다. 며칠 동안 제작진과 함께 지내며 내 어릴 적 추억이 얽힌 곳을 포함한 명소를 답사해 10월10일에 방영한다고 했다. 나는 충남 당진에서 태어났지만 김천은 소년시절 사회의식을 틔웠던 ‘고향’ 같은 곳이다. 모교인 김천중학교를 비롯해 방학 때마다 찾았던 추풍령 고갯마루의 큰집, 전국 생산량의 11%를 차지할 정도로 넓은 포도밭 등을 둘러볼 참이다. 나는 대구에서 무려 다섯개의 초등학교를 다닌 뒤 여섯번째로 김천의 중앙국민학교로 전학했다. 초등학교 교감이셨던 아버지의 전근을 따라 나도 자동으로 학교를 옮겨다닌 것이다. 그래서 내 유년시절은 새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긴장감과 정들면 떠나야 하는 아쉬움이 교차하는 아픈 체험의 연속이었다. 김천중 2학년 때 6·25가 터졌다. 우리 가족은 그때 중앙국교 안에 있는 교감 사택에서 살았다. 운동장에는 미군부대가 진주하기도 했고 영국 군대가 잠시 머물기도 했다. 그때 바로 그 운동장에서 벌어졌던 한가지 소동은 어린 내게 충격과 함께 깊은 깨침을 안겨줬다. 집에서 기르던 돼지 한마리가 운동장 주변의 풀을 뜯어먹으며 꿀꿀거리고 다니자, 미군들이 장난처럼 카빈총으로 돼지를 겨냥했다. 나는 그때 정말 장난인 줄 알았다. 그런데 미군 한명이 돼지를 쏘았다. 아마 자기들끼리 내기를 한 듯하다. 돼지는 그 자리에서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퍼뜩 이런 상상이 떠올랐다. 만약 그 돼지가 총을 겨누는 미군들에게 두 발로 벌떡 일어서서 이렇게 통사정을 했다면 어찌됐을까? “미군 아저씨, 나를 쏘지 마세요. 나한테는 새끼가 아홉마리나 있는데 그놈들에게 젖을 먹이려면 어미인 내가 열심히 먹고 잘 살아있어야 해요. 제발 내 새끼들을 생각해서라도 장난으로 나를 죽이지 마세요”라고 했으면 그 돼지는 죽음을 면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때 말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새삼 깨달았다. 말하는 존재는 그래서 존엄한 인격적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 그래서 언어의 표현과 그 표현의 자유가 가장 소중한 인간의 기본권임을 나는 그때 온몸으로 깨달았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 표현의 자유라는 땅 위에서만 피어나는 향기로운 꽃이다. 김천에서 나는 전쟁의 참상을 목도하기도 했다. 전투기의 폭격으로 초가집들이 초토화되는 장면도 여러 번 봤다. 이런 환난으로 아내와 자식 둘까지 잃고 우리 어머니께 찾아와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울던 사촌 자형의 모습도 잊히지 않는다. 40여년 전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나는 6·25와 같은 비극이 언제든지 한반도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현실을 새삼 주목하게 된다. 분단과 전쟁, 이념적 대결, 그리고 그 대결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강경냉전세력, 이들에 의한 민주주의와 인간 기본권의 훼손 등이 지금도 우리 민족과 국민의 마음과 몸을 아프게 한다. 이 아픔을 종식시킬 수 있는 정치지도자들이 하루빨리 나와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런 지도자가 나오기 어렵게 꼬여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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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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