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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10일 김대중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씨가 노벨평화상 수여식에 앞서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 후문에서 2000여명의 어린이와 함께 축하공연을 보고 있다. 문민정부 시절 햇볕정책으로 ‘색깔론’에 시달렸던 필자는 이날 시상식에 초청받아 남다른 감회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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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47
2000년 12월3일 외교통상부 의전1담당관실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시상식 초청 인사 안내장을 보내왔다. 앞서 10월13일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노벨상위원회 군나르 베르예 위원장은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김대중’의 이름을 불렀다. 노벨상 제정 100년 만에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북한 노동당 창설 55돌 잔치에 남쪽 참관단 대표로 참석했던 당시 평양의 만찬장에서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낭보’를 전해들었다.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민주동지의 한사람으로서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반도의 ‘두 김씨 지도자’가 이 명예로운 상을 나란히 받게 됐다면 더 감동스러웠겠지만, 여하튼 오슬로에 동행하게 된 건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역사의 행운이기도 하다. 12월8일 김 대통령 내외 및 100여명의 수행원과 함께 서울공항에서 특별기(B747)를 타고 노르웨이로 출발했다. 디제이가 군사법정에서 사형 구형을 받았을 때 함께 눈물 흘리면서 애국가를 불렀던 동지들 가운데 상당수가 동반해 더 뿌듯했다. 마침내 오슬로 공항에 도착하니 북유럽 특유의 음산한 겨울비가 우리를 맞았다. 수상자나 수여자 모두 평화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고, 평화의 종점을 향해 끊임없이 멀고 험한 길을 달려가야 함을 깨우치려는 듯했다. 12월10일 노벨평화상 시상식장인 오슬로 시청의 중앙홀은 화려한 궁전 같은 곳이 아니었다. 단상에는 원래 장미꽃 단장을 하는데 올해는 노벨상위원회에서 특별히 디제이의 햇볕정책을 상징하는 해바라기로 꾸며 놓았다고 한다. 나는 밝게 웃는 듯한 해바라기를 보며, 와이에스와 그 주변 냉전 강풍론자들을 잠시 아쉬운 마음으로 떠올렸다. 좋은 기회를 놓친 정말 딱한 사람들이다. 베르예 위원장의 강연은 훌륭한 평화연설이기도 했다. 김 대통령의 수상 이유는 크게 두 가지 공헌 덕분이라고 했다. 첫째는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향상을 위해 기울인 평생의 노력이요, 둘째는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헌신이라고 했다. 노벨상위원회는 한 가지 원칙을 항상 굳게 유지하고 있다. ‘과감한 시도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는 원칙이다. 그는 노르웨이 시인 군나르 로알크밤의 시 ‘마지막 한 방울’(더 라스트 드롭)을 인용해 첫 시도, 첫걸음이 가장 힘든 일인데 김 대통령은 그것을 해냈다고 했다. 그는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평화정책으로 높이 평가하면서 연설을 마쳤다. “북한 주민들은 오랫동안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왔습니다. 국제사회는 그들의 굶주림에 무관심할 수 없으며, 북한의 엄청난 정치적 억압 앞에서 침묵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북한 지도자들도 남북한간 화해를 향한 첫발을 내딛게 한 공로를 인정받을 자격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냉전의 빙하시대는 끝났습니다. 세계는 햇볕정책이 한반도의 마지막 냉전 잔재를 녹게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과정이 시작되었으며 오늘 이 상을 받는 김 대통령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한 분은 없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첫번째 떨어지는 물방울이 가장 용감합니다.” 이어 베르예 위원장으로부터 노벨평화상 메달과 상장을 수여받은 김 대통령은 수상 연설을 했다. 그 연설에서 내가 특별히 박수치고 싶었던 대목은 북-미, 북-일 관계 개선을 비롯해 다른 서방국가와 북한의 교류를 강조한 부분이다. 디제이는 남북관계 개선만으로는 한반도 평화를 완벽하게 성공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는 이른바 교차승인의 완성이자 냉전동맹관계의 해체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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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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