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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 필자는 뜻밖에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취임해 2007년 말까지 3년간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간 인도주의 협력과 교류에 힘썼다. 사진은 그해 12월말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 공약한 ‘청소년 특별회의’ 회원들과 청와대를 방문해 찍은 기념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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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58
2004년 11월24일 청와대에서 뜻밖의 소식이 왔다. 노무현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떠나면서 나를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추천했다고 한다. 얼마 전 주변에서 나를 국가인권위원장으로 지명할 것이라는 얘기를 전해들었기에 더 어리둥절했다. 언론을 통해 이윤구 적십자사 총재가 사표를 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때 나는 그가 왜 갑자기 그만뒀는지 속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아무튼 남북간 평화 증진에 기여해온 헌신을 바탕으로 적십자 활동을 한 차원 높게 추진하라는 뜻으로 일단 받아들였다. 12월6일 이세웅 적십자사 부총재와 간부들과 만났다. 내년이 마침 대한적십자사 창설 100돌이어서 이례적으로 국제적십자연맹 총회를 한국에 유치했다고 한다. 세계적인 인도주의 잔치를 치러야 한다고 했다. 내년은 여러모로 역사적인 해다. 일제가 우리 외교권을 강탈해간 지 100년이요, 해방과 분단 60돌이 되는 해다. 그렇기에 내년은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진정한 민족 광복의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하는 해이기도 하다. 그만큼 내 어깨는 무거워지는 것 같다. 하기야 신나게 무거운 짐이다. 12월9일 전 적십자사 총재인 서영훈 선생께서 나를 위해 오찬을 마련해주었다. 여러 간부들이 참석해 상견례 자리가 됐다. 적십자 중앙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총재 추대를 받은 나는 취임식 전날인 12월15일 개성공단 방문으로 총재로서의 첫 공식 행사에 참석했다. 남북 당국자 합의에 의해 추진된 개성공업지구에서 첫 제품 생산을 기념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이때만 해도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북한 당국에는 일종의 기피인물이었다. 그것은 다소 터무니없이 억울한 대접이었다. 그가 통일부 장관으로 임명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베트남에 억류되어 있던 탈북자 수백명이 한국에 비행기 편으로 이송됐는데 이에 북한 당국은 격노했다. 전임 장관 때 추진된 일이었으나, 날벼락은 정 장관에게 떨어진 격이 되었다. 개성공단 행사장은 초겨울 날씨로 을씨년스러웠는데 북쪽 당국자들의 표정도 쌀쌀하기만 했다. 특히 북쪽 대표자인 주아무개 선생은 민망할 정도로 정 장관을 무시해 나까지 퍽 불편했다. 개성시내로 들어가 주암여관에서 오찬을 할 때도 주석에 정 장관 자리는 없었다. 그런데 식사를 다 마칠 무렵 북한 당국자 한 분이 다가와서 대뜸 ‘총재님 오늘 불쾌하셨지요’라고 살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그가 북한의 실세 조직에 속한 인사임을 직감했다. 오늘 주 선생의 태도만이 북한 당국의 판단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너무 상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래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차 안에서 정 장관에게 전화로 이런 북한 당국의 다른 태도를 전하며 위로했다. 12월28일 오후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공약한 ‘청소년 특별회의’가 구성돼 나는 의장 자격으로 청와대 만찬에 참석했다. 만찬 시간 30분 전에 대통령 내외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과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과 청와대 비서진을 대동하고 내가 대기하고 있던 소회의실로 왔다. 김 장관은 나더러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겼으니 부럽다고 덕담을 했다. 노 대통령은 90년대 초반쯤인가 내가 서울대 교수 시절 한 신문에 쓴 칼럼을 통해 ‘정치적으로 큰 위기를 당한 자기에게 용기를 줬다’며 새삼 감사의 인사를 전해 당황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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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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