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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31일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이산가족 면회소 착공식에서 대한적십자사 총재인 필자(오른쪽 둘째)와 장재언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위원장(오른쪽 셋째) 등 남북 적십자사 회원들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왼쪽 셋째)이 첫삽을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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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160
2005년 7월13일 남북 적십자사 실무진은 개성에서 만나 이산가족들의 시범 화상상봉에 관한 합의서를 만들어냈다. 광복 60돌인 올해 8월15일을 계기로 쌍방 각기 100명씩 화상상봉 후보자를 확정하고, 상봉시간은 가족당 1시간으로 정했다. 첫 원격만남을 통해 조금이나마 더 많은 이산가족이 대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7월19일에는 대북지원용 자전거 기증식을 했다. 주민등록번호를 통한 행정 정보화가 잘돼 있는 남쪽과 달리, 북쪽에서는 이산가족을 찾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교통수단이 열악해 사람을 찾아가기가 쉽지 않은 형편이라고 했다. 그래서 북한 적십자를 통해 자전거를 보내기로 했다. 제15차 남북장관회담 합의에 따라 8월23~25일 제6차 남북적십자회담을 한 데 이어 8월29~30일 마침내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렸다. 상봉단 단장 자격으로 실무진을 이끌고 29일 금강산에 도착하니 북쪽 적십자 대표단이 마중을 나왔다. 이날 저녁 만찬 때 남북 이산가족들은 감격의 단체상봉을 했다. 정말 순간순간 감동과 눈물이 강처럼 흐르는 마당이었다. 이튿날에는 개별상봉으로, 호텔방에서 가족끼리만 회포를 풀 수 있도록 특별히 배려했다. 과연 얼마나 진솔한 소통을 할지는 모르지만, 외부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서로 속내를 풀어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 시간 북한 적십자위원회 장재언 위원장과 따로 만난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깊은 강물은 소리 없이 흐릅니다. 얕은 개울물은 시끄럽게 소리 내며 흐르기 마련이지요. 신뢰가 깊을수록 서로 소리 내지 않더라도 깊은 소통을 해낼 수 있습니다. 이 깊은 신뢰의 소통 흐름을 누구도, 어느 밖의 세력도 멈출 수 없지요.” 8월31일 금강산이 햇볕을 받아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화창한 날, 오전 11시 이산가족 면회소 착공식이 진행됐다. 전국 각 지역 적십자 지사장과 중앙위원들, 그리고 서영훈 전 총재도 참석했다. 나는 삽으로 세 번 모래를 퍼 던지면서 속으로 “냉전시대여 잘 가라!” “평화여 빨리 오라!” “적십자 인도주의여 활짝 꽃피어라!”라고 외쳤다. 북한적십자 장 위원장의 착공사는 강렬한 민족통일 의지를 담고 있었다. “…우리는 금강산 면회소 건설을 통해 하나가 되려는 우리 민족의 강렬한 의지는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외세가 강요한 나라의 분열은 장장 60년 세월 흩어진 가족·친척들의 가슴속에도 쓰라린 고통과 아픔만을 남겨놓았습니다. 이제 더는 외세에 자기의 운명을 농락당하지 말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의 그날을 하루빨리 안아 와야 합니다. 곧 터지게 될 착공의 발파 소리는 갈라진 혈육을 서로 찾고 부르며 응어리졌던 흩어진 가족·친척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풀어주면서 온 겨레의 자주통일 염원을 담아 삼천리 강산에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 저녁 나는 남쪽 참가단 몇분을 만찬에 초대했다. 여기서 서 전 총재가 여운형·김규식·손정도·김일성 등 민족지도자들을 평가하면서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 그 얘기를 듣던 북쪽의 여성 봉사원이 “김일성 수령님이라고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고 정색하며 반발을 하고 나섰다. 우리로서는 당혹스럽고도 어이없었다. 북한이 컬트국가임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정말 소통하기 힘든 상대다. 그러나 더 인내심을 갖고 역지사지하며 소통해야 할 것 같다. 11월11일 오전 삼성동 코엑스에서 ‘제15차 국제적십자연맹 총회’가 개막했다. 우리는 주최국으로서 올해 내내 꾸준히 총회를 준비해왔다. 14일까지 총회를 연 데 이어 11~18일에는 연맹과 국제적십자위원회 대표가 함께하는 대표자회의를 했다. 181개 나라 적십자 대표와 유엔을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 대표 등 1000명 가까이 참가했다. 북한도 조선적십자 국제담당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 8명을 보내왔다. 남북 대화가 아닌 국제회의와 관련해 북한 대표가 이렇게 많이 서울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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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전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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