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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평양으로 온 오재식은 당시 오정모 전도사(오른쪽)가 지도한 산정현교회 주일학교에서 엄격하고 원칙적인 신앙생활을 배웠다. 35년 주기철 목사(왼쪽)와 결혼한 오 전도사는 44년 신사참배 거부 끝에 순교한 주 목사의 뜻을 이어 교회를 이끌다 47년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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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7
1906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분리·설립된 산정현교회는 일찍이 조만식 선생이 장로를 지내는 등 조선예수교장로회의 본산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36년 8월 주기철 목사가 부임한 이래 교회는 엄격한 정통주의적 신앙생활을 강조했다. 경남 창원 출신인 주 목사는 어린 시절 가정에서부터 철저한 신앙 교육을 받았으며, 신학을 배우고 목회를 하는 동안 신앙생활에 대한 원칙을 세워 나갔다. 이런 주 목사에게 신사참배는 십계명의 제1계명과 2계명을 어기는 행위였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일제와 맞선 주 목사가 44년 4월 감옥에서 순교한 뒤 산정현교회의 신앙교육을 이끈 사람은 오정모 전도사였다. 오 전도사는 31년 당시 주 목사가 시무하던 마산 문창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이자 집사로 인연을 맺었다. 주 목사의 첫번째 부인인 안갑수 사모는 종기 수술 후유증을 앓으며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예감하고는 오 전도사를 불렀다. 그러고는 당시 15살·12살·7살 그리고 갓 돌이 지난 막내 광조와 주 목사의 뒷바라지를 부탁하는 유언을 남긴 채 33년 5월 34살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교육가를 꿈꾸며 서른살이 훨씬 넘도록 결혼을 하지 않았던 오 전도사는 아이들과 남편을 부탁하는 그 유언을 뿌리칠 수 없었다. 오 전도사는 아주 꼿꼿한 여성이었다. 그는 35년 결혼한 이래 주 목사가 최후까지 일제에 항거할 수 있도록 옆에서 끊임없이 독려했다. 주 목사가 39년 1월 두번째 수감생활을 마치고 풀려났을 때 그가 한 첫마디는 이랬다. “승리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시 감옥에 들어가시오.” 혹시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정신 승리’가 아니라, 일제에 굴복하고 풀려난 것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 뒤로도 되풀이된 투옥과 고문으로 심신이 약해진 주 목사가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듯하면 그는 “당신, 신사참배에 찬성하고 거기에 무릎 꿇기만 해봐요. 전 당장 이혼할 겁니다” 하면서 압박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한국 교회의 미래와 기독신앙을 위해 주 목사의 행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 목사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산정현교회는 방계성 전도사를 중심으로 주 목사 석방을 위한 금식기도를 하는 등 전체 교인들이 더 단단히 뭉쳤다. 하지만 산정현교회와 주 목사를 괴롭힌 것은 일제만이 아니었다. 39년 12월 일제의 강압에 굴복한 평양노회는 임시총회를 열어, 38년 9월 제27차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와 총회장(홍택기)의 경고문을 무시하였다는 이유로 주 목사를 파면하였다. 이에 따라 평양노회에서 파송된 전권위원들이 산정현교회를 접수하러 오자 청년회원들이 막아섰고, 그 과정에서 소요가 일었다. 그 때문에 청년회원 30여명이 일경에 연행되기도 했다. 이처럼 날로 거세지는 외압에 전 교인들이 힘을 합치며 이겨나가는 데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바로 오 전도사였다. 그는 전 교인을 모아놓고 찬송과 기도를 인도하였는데, 그 위력은 상당한 것이어서 기세에 놀란 전권위원들이 꼼짝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일경조차 감히 손을 못 댈 지경이었다. 오 전도사는 자주 금식기도를 하며 기도의 힘으로 믿음과 신앙을 꼿꼿하게 지켜나갔다. 아주 사납게 굴던 사람들도 오 전도사가 그 앞에서 기도를 시작하면 순한 양처럼 변하곤 했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재식이 산정현교회를 나가던 45년 가을 무렵 주일학교 교장도 맡고 있던 오 전도사는 아이들의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맹훈련시켰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 ‘주일날 밥하면 안 된다. 주일에는 전날 한 찬밥을 먹되 금식하면 더 좋다’ ‘주일엔 돈 쓰면 안 된다’ ‘토요일은 교회에 와서 철야기도해라’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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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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