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3년 오재식은 일본 도쿄대 교환교수로 온 지명관 당시 덕성여대 교수를 설득해 일본에 남아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위한 활동을 함께 시작했다. 사진은 세계교회협의회로부터 지 교수의 일본 장기체류 예산을 지원받는데 앞장선 박상증(맨왼쪽) 당시 세계교회협 간사가 스위스 제네바 본부에서 회의하고 있는 모습.
|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55
1972년 지명관 교수가 1년간의 도쿄대 교환교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던 무렵 오재식은 식사 자리에서 작심한 듯 얘기를 꺼냈다. “한국에 못 돌아가십니다.” 그러자 지 교수는 처음엔 화를 냈다. “이 사람아, 내가 외아들이야. 연로하신 어머니가 서울에 계시고, 아이들이 세 명이나 있는데 다짜고짜 나보고 가지 마라면 어떡하란 말이냐.” 하지만 재식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니, 선배님이 먼저 한국 상황이 심상치 않아 여기서 할 일이 많다고 하시고는 훌쩍 돌아가시면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그런 일을 제가 혼자서 어떻게 합니까? 선배님이 계셔야죠. 아마도 아주 할 일이 많을 겁니다. 선배님이 저에게 그런 일을 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렇지만 지 교수도 쉽게 결정을 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자 재식은 내친김에 방점을 찍었다. “선배님, 우리를 일본으로 보내신 것은 위에 계신 분(하나님)의 뜻일 겁니다. 이건 오재식이 하는 말이 아니라 하늘의 명령입니다. 가시면 안 됩니다.” 몇 주일이 지난 뒤, 지 교수는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표정으로 재식에게 말했다. “이 사람아, 자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재식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절대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지극한 겸손함으로 누구에게나 신뢰감을 주는 게 강점이었다. 지 교수도 그러한 재식의 면면을 잘 알기 때문에 인생의 물줄기를 바꿀 결단을 하지 않았을까. 막상 지 교수가 도쿄에 남겠다고 하니, 앞으로 그의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이 재식에게는 발등의 불처럼 떨어졌다. 우선 급하게 박상증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다. 박 목사는 한국인 최초로 67년부터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교회협의회(WCC) 간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박 목사는 세계협의회 선교부 이름으로 돈을 보내왔다. 사실 그때 박 목사는 재식의 요청을 받고 세계협의회에 예산을 신청했다. 그런데 총무인 에밀리오 카스트로가 지원받을 사람이 한국인이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에서 추천을 해줘야 예산을 책정할 수 있다며 추천서를 요구했다. 그 뒤 어느 날 재식은 당시 한국교회협의회 총무인 김관석 목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자네 지 선생에게 일본에 남아 달라고 한 모양인데, 그 일로 세계협의회에서 예산을 받아야 한다지?” “네, 그렇습니다.” “그거 꼭 해야 되는 거야?” “틀림없이 해야 되니까, 절 믿고 무조건 추천서를 써주십시오.” 김 목사는 추천서를 보냈고 그렇게 해서 지 교수의 도쿄 체류비는 세계협의회의 예산으로 책정되어 지원을 받게 됐다. 지 교수의 신분은 세계협의회에서 특수선교 자문위원으로 파견하는 형식을 갖추어 도쿄여자대학 객원교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도쿄여대에서는 그가 정교수로 임용된 85년까지 보수는 주지 않았다. 그사이 12년 동안 그의 체재비는 세계협의회에서 지원했다. 덕분에 지 교수는 73년 초부터 서울에 있는 가족에게도 생활비를 보내며 안정된 조건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려했던 대로 국내 정치 상황은 독재로 치닫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72년 10월17일 ‘우리 민족의 지상 과제인 조국의 평
|
고 오재식 선생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