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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식은 아시아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 간사로서 1973년 아시아지역 여성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연대기구를 비밀리에 추진해 아시아여성위원회(카우)를 조직해냈다. 사진은 당시 그의 제안으로 카우 조직사업을 맡았던 일본 여성 활동가 시오자와 미요코(왼쪽)와 그가 83년 펴낸 <메이드 인 동남아-현대의 여공 애사)(오른쪽)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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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58
언젠가 지명관 선생은 오재식의 장점 가운데 하나로 적재적소에 필요한 사람을 잘 선택하는 능력을 꼽은 적이 있다. 1973년 도쿄에서 진행한 ‘민중포럼’(피플스 포럼) 때도 재식은 ‘필요한 사람’을 발굴해냈다. 일본인 여성 활동가 시오자와 미요코였다. 시오자와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일본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현장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또 ‘보릿고개’를 배경으로 삼은 논픽션 소설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재식은 일본에도 음력 3월쯤 되면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굶주리던 보릿고개가 있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껴 그 소설을 읽어보았다. 소설은 기차도 버스도 다니지 않는 외진 시골에서 자란 주인공이 그 어려운 춘궁기에 가족을 위해 화려한 도시로 나와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 돈을 벌어 고향의 부모에게 보낸다는 내용을 그리고 있었다. 시오자와에게 직접 연락해 처음 만난 자리에서 재식은 그가 아시아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CCA-URM)에서 함께 일할 재목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래서 민중포럼에 그를 초청했다. 다행히 그는 ‘성숙한 민중’이라는 포럼의 주제에 깊은 공감을 했다. 포럼 내내 그의 눈이 빛나는 것을 재식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포럼 이후에도 재식은 시오자와와 자주 만나 도농선교회와 기독교가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있는지를 두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그에게 ‘함께 일하고 싶다’는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그는 엉뚱한 이유로 제안을 거절했다. 바로 국제적인 일을 하기에 영어 실력이 많이 부족하고 ‘마흔살’ 나이도 너무 많아 자신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정도에서 포기할 재식이 아니었다. 끈질긴 설득 끝에 홍콩에서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주선했고, 그 덕분에 시오자와는 홍콩으로 떠났다. 재식은 도농선교회 간사로서 2년 남짓 아시아 여러 나라를 둘러보면서 노동환경의 열악한 현실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한국은 물론이고 홍콩·대만·싱가포르 등에서도 여성은 가장 착취받는 존재였다. 여성 노동자의 힘을 모으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한 그는 ‘아시아여성위원회’(카우·CAW)의 조직화에 적극 나섰다. 재식은 바로 이 카우의 조직 사업을 홍콩에서 영어를 배우고 돌아온 시오자와에게 맡겼다. 또 아시아 각 지역의 가톨릭의 참여를 끌어내 활동 반경을 점차 넓혀갔다. 사실 활동가를 훈련시키고 각기 다른 여러 나라의 여성 노동자 단체들을 한데 묶어내고 자금을 조달해내는 과정은 오랜 기간이 걸리는 까닭에 때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민중포럼을 통해 쌓은 인적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시오자와는 이때의 경험을 담아 <메이드 인 동남아-현대의 여공 애사>(이와나미)란 책을 써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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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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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정리 이영란/<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 엮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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