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3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부총무로 당선된 해리 대니얼과, 그 후임으로 세계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 간사를 맡은 조지 토드는 70~80년대 오재식의 한국 민주화운동 지원을 가능하게 해준 후원자들이다. 사진은 2007년 미국 장로교 사회복지부로부터 공로상을 받은 조지 토드(오른쪽)와 부인 캐시 토드의 모습.
|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60
1973년 5월 싱가포르 본부에서 열린 아시아교회협의회(CCA) 5차 총회에서 처음 도입된 부총무 선거에서 해리 대니얼은 프로그램 담당으로, 뉴질랜드인 론 오그레이디는 행정 담당으로 뽑혔다. 오재식은 뒤늦게 박상증 목사가 의장단을 설득해 하룻밤 사이에 정관을 바꾸게 된 사실을 전해듣고 그 추진력에 새삼 탄복했다. 해리 대니얼이 맡았던 세계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WCC-URM) 간사 후임으로는 마침 미국의 조지 토드가 선임됐다. 그동안에도 늘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두 사람이 같은 부서의 실무 책임자로 포진하게 됐으니 재식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었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재식이 70년대 내내 도쿄에서 한국 민주화를 지원하는 일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대니얼은 세계협의회 간사 시절 도농선교회의 사업 예산을 획기적으로 늘려놓은 ‘미다스의 손’이었다. 앞서 71년 재식에게 도쿄 사무실을 맡기고 제네바 본부로 갔던 그는 고질적인 예산 부족 문제부터 해결하는 데 몰두했다. 그는 재식에게 그 일화를 종종 들려주곤 했다. 대니얼이 제네바 본부에 가보니 세계협의회 도농선교회의 1년 예산은 고작 5천달러에 불과했다. 기가 막힐 지경이었던 그는 그 상태로는 도저히 새로운 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는 판단에 세계협의회 총무인 필립 포터에서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총무는 “회원 교회들이 후원을 해주지 않는데 돈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선교부’나 ‘신앙과 직제부’와 달리 도농선교회는 노동자·농민·빈민 등을 위한 활동을 하는 까닭에 교회를 위한 일이 아니라며 불편해하는 시각과 인식들이 세계교회 안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니얼은 한 가지 묘책을 생각해냈다. 선교부 소속인 도농선교회를 독립 부서로 만들어 별도로 예산을 집행하도록 해달라고 총무를 설득한 것이다. 대신 선교부의 지원은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후원 기금을 마련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총무로서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곧바로 후원 단체를 찾아나선 그는 독일의 한 단체 대표를 만나 담판을 벌였다. 먼저 도농선교회의 활동 상황과 그 배경 역사를 설명한 뒤 가장 낮은 사회계층인 민중들의 삶터가 선교의 현장임을 역설했다. 더불어 그들을 외면한다면 기독교가 말하는 선교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강변했다. 교회만 늘리고 살찌우는 선교는 그리스도의 뜻이 아니지 않으냐는 그의 열정적 호소는 유효했다. 그런 노력 끝에 그는 200만달러의 기금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막상 대니얼이 거액을 모금해오자 본부에서는 놀라면서도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예산 항목만 따로 만들어 달라더니, 딴 데 지원할 기금을 혼자 다 끌어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총무는 대뜸 화를 냈다. 하지만 기존 후원 회원사나 단체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모금원을 개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총무도 대니얼의 능력에 감탄하며 인정을 해주었다.
|
고 오재식 선생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