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재식은 1973년 6월 이른바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으로 박형규 목사를 비롯한 개신교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구속되자 아시아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의 예산으로 이들의 재판과 석방운동을 지원했다. 사진은 그해 10월 보석으로 석방된 뒤 박 목사와 권호경 전도사가 일어로 쓴 답례 인사문(오른쪽).
|
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61
오재식은 1970년대 내내 아시아교회협의회 도시농촌선교회(CCA-URM) 간사로서 도쿄에서 일하는 동안 무엇보다 넉넉한 예산지원을 받으며 활발한 사업을 펼칠 수 있었다. 상부기관인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도시농촌선교회에서 확보한 연 예산 200만달러 가운데 100만달러를 아시아 쪽에 지원해준 덕분이었다. 재식은 그 가운데 절반을 한국을 위해 배정했다. 해리 대니얼, 조지 토드, 다케나카 마사오 위원장 등 모두가 한국의 도시산업선교와 민주화운동을 돕는 데 기꺼이 동의해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국 지원금은 도시산업선교회를 비롯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학생기독운동단체 등에서 예산이 없어 실행하지 못하는 활동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77 기독자선언’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해직된 교수들을 비롯해 박정희 독재로 양산된 수많은 투옥자와 양심수 가족들의 생활비처럼 국내에서는 쉽사리 드러내놓고 마련하기 어려웠던 비용도 재식을 통해 도쿄에서 보내졌다. 월간 <말> 발행 자금이나 국내 환경운동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공해문제연구소’ 창립 같은 크고 작은 시민문화단체 활동에도 적잖이 보탬을 줄 수 있었다. 그래서 재식은 훗날 귀국한 뒤 한국 민주화운동이 성공하기까지 세계협의회와 아시아협의회의 파격적인 지원이 큰 힘이 됐다는 사실을 민주화 진영과 교회는 물론 시민사회가 잊지 말아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곤 했다. 72년 ‘10월 유신’ 이후 국내 개신교 내 진보진영은 유신체제 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72년 12월13일 전주 남문교회 은명기 목사 구속사건은 유신 체제와 한국 교회의 갈등을 드러낸 첫 사례였다. 그해 11월 박 정권은 은 목사가 준비위원장을 맡아 유신헌법 반대 집회를 연다는 편지가 나돈 뒤 철야기도회를 인도하던 그를 전격 연행해 구속해버렸다. 뒤이어 73년 4월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이 터졌다. 71년 9월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를 결성해 청계천 등지에서 주민운동을 펴고 있던 서울제일교회 박형규 목사는 유신독재에 맞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시대적 사명을 각성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인식을 하고 있었다. 마침 4월22일 5시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개신교의 진보세력을 대표하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보수세력의 연대기구인 대한기독교연합회가 함께 부활절 연합예배를 열기로 했다. 이는 별도로 부활절 행사를 해온 두 진영이 17년 만에 한자리에 모이는 것으로, 한국 교회로서는 뜻깊은 행사였다. 박 목사는 함께 활동하던 당시 전도사 권호경·김동완에게 이날 ‘거사’를 위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두 사람은 유신체제의 부당성을 알리는 펼침막과 전단지를 만들고 실행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막상 부활절 예배 날, 거사는 무산되고 말았다. 펼침막을 들기로 했던 활동가 중 한 명이 경찰의 삼엄한 감시와 경비에 겁을 먹고 포기했던 것이다. 대신 예배가 끝나고 나오는 신자들에게 기독학생회총연맹(KSCF) 학생들이 한 모퉁이에 서서 전단지를 나누어주거나, 전단지 몇장을 헌금함에 넣어두고 왔을 뿐이었다. 전단지에는 ‘민주주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이다.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
고 오재식 선생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