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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0월 중순 일본 시즈오카현 고텐바시의 와이엠시에이 수련관에서 열린 ‘도잔소 회의’는 북한 대표는 불참했지만 한반도 통일운동의 물꼬를 튼 역사적 계기로 평가받는다. 사진은 도잔소 회의에 참석한 국내외 한국 대표단이 함께한 모습으로, 이우정(앞줄 오른쪽 둘째), 문동환·박상증(둘쨋줄 오른쪽부터), 강문규·오재식(셋쨋줄 오른쪽부터)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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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식-현장을 사랑한 조직가 76
1984년 10월 일본 시즈오카현 고텐바시의 도잔소에서 한반도 통일협의회를 열기로 결정되자 오재식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김소영 총무와 통일위원회를 통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갔다. 그에 호응해 국외에서도 전폭적인 지지와 도움이 있었다. 기독자민주동지회는 ‘도잔소 회의’를 드러나지 않게 직간접 지원했다. 특히 일본에서 열리게 되면서 당시 아시아교회협의회(CCA) 부총무를 맡고 있던 박상증 목사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발의하는 이 회의에 아시아협의회도 참여하도록 주선했다. 또 세계협의회 국제문제위원으로 제네바에 있던 강문규 선생도 도잔소 회의에 대한 회원국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그런데 정작 도잔소 회의의 공식 명칭은 ‘한반도 통일협의회’로 밝힐 수가 없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공안통치 아래서 ‘통일’은 금지된 용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협의회 국제위원회 국장인 나이난 코시와 의논한 끝에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에 관한 협의회’로 내걸었다. 이런 명제에 맞춰 대만과 일본 대표도 발제를 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회의 장소인 ‘도잔소’는 고텐바시에 있는 와이엠시에이(YMCA) 수련관 이름이다. 수련관에서 동쪽으로 후지산을 볼 수 있다고 해서 ‘동산장’(東山莊)이라 했는데, 그 일본식 발음이 도잔소였다. 강문규 선생의 요청과 일본 와이엠시에이의 특별한 협조로 제공된 장소였다. 도잔소 회의를 며칠 앞둔 10월10일 필립 포터 총무와 코시 국장이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창립 60돌 기념행사를 축하한다는 명분이었다. 원래 창립 기념일은 9월24일이었으나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가 도잔소 회의에 참석하고자 일정을 맞추었던 것이다. 재식은 이들을 위한 한국 일정 프로그램을 짰다. 먼저 포터 총무는 서울과 대구 등에서 모두 7차례 강연을 했는데 마지막 일정은 광주였다. 광주에서는 하룻밤을 묵으면서 지역 대표들과 면담을 할 기회도 있었다. 포터와 코시는 광주항쟁을 몸소 겪은 시민들도 만나 위로하고 망월동 5·18 묘지도 참배했다. 포터는 아주 정중하게 묵념을 하고 준비해 온 꽃다발을 바쳤다. 포터 일행은 10월15일 서울로 올라와 곧바로 한국 대표단 10명과 함께 일본으로 향했다. 한국 대표단은 김 총무와 재식을 비롯해 지명관·김준영·김상근·이우정·이영창·서병조·김형태·이인하·김군식·박상증·손명걸 등이었다. 포터 총무가 이처럼 직접 나선 덕분에 도잔소 회의는 그 의미가 한층 격상될 수 있었다. 제3대 총무인 그는 73년부터 12년간 재직하며 세계적인 에큐메니컬운동을 이끌었다. 도잔소 회의에서 필립 포터는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와 이준 열사에 대한 이야기로 강연을 펼쳤다. 한국 역사를 미리 공부하고 준비했던 것이다. 이날 회의에는 한국 현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 교수도 발제자로 참석했다. 도잔소 회의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홍콩·대만·필리핀 등 아시아 국가와 미국·러시아 대표들도 참여해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한반도 통일문제 협의의 당사자인 북한 대표는 끝내 오지 않았다. 총련을 통해 축전만 보내왔을 뿐이었다. 북한 대표로 초청된 조선그리스도연맹이 참석하지 않은 것은 애석한 일이었지만 분단 이후 북쪽 기독교계와 첫 접촉을 했다는 점만으로 성과를 이룬 셈이었다. 도잔소 회의는 한반도의 통일 문제를 동북아시아라는 틀에 담았고 평화를 앞에다 내세웠다. 군사적 대결 구도가 국민을 볼모로 한 소모전이라는 전제 아래, 냉전체제의 허구성, 양대 진영의 무기 판매 경쟁, 세계경제의 반인권적인 운영 실태 등을 논의함으로써 ‘평화’라는 주제를 설정하기 위한 기초공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각국 참석자들은 정치 구호로서의 평화는 단명한다는 것과 그것이 종교적 신념과 헌신 없이는 세울 수도, 지켜질 수도 없다는 인식을 함께했다. 이로써 도잔소 회의는 한반도 통일운동의 물꼬를 텄다는 역사적 의의를 지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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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재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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