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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3월12일 ‘체포령을 해제하고 모든 조건을 수용한다’는 관계기관의 말을 믿고 명동성당 농성장을 나와 인천으로 향하던 동일방직 조합원들은 이총각 지부장이 결국 체포되자 3월14일 다시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단식농성을 벌였다. 사진은 당시 김수환 추기경(맨 오른쪽)과 강원용 목사(오른쪽 둘째)가 농성장을 방문해 조합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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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51
1978년 3월12일 이총각은 ‘체포령을 해제하고 모든 조건을 수용한다’는 관계기관의 말을 전해듣고 답동성당에 있는 동일방직 민주노조 조합원들과 합류하기 위해 명동성당을 나와 인천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라 김몽은 명동성당 주임신부와 수녀들이 2대의 차에 나눠 타고 함께 갔다. 그런데 부평 인터체인지에 들어서자 갑자기 무장경찰 여러명이 차를 세우더니 다짜고짜 총각을 끌어내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김 신부는 “어느 놈이 시켰어?”라고 호통치며 총각의 한쪽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경찰 한명이 총각의 다른 팔을 잡아당겨 옷이 다 뜯어졌다. 그때 또 다른 경찰이 총부리를 들이대며 빨리 차에 태우라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김 신부는 총각을 놓치고 말았다. 총각은 그들의 거짓된 약속에 또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억울하고 서러워 목 놓아 통곡을 했다. 인천 동부경찰서로 끌려간 총각은 밤새 조사를 받은 뒤 이튿날 노동절 기념식장에서 소란을 야기했다는 이유로 29일간의 구류처분을 받았고 열흘 뒤 풀려났다.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지부장이 연행당하자, 조합원 43명은 3월14일 다시 서울로 올라와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인천에서도 다음날부터 조화순 목사와 실무자까지 합세해 모두 67명이 도시산업선교회 지하실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그러자 동일방직 작업현장에 남아 있던 조합원들도 출근거부·태업·단식 등으로 농성자들과 함께했다. 단식농성의 요구조건은 ‘첫째,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둘째, 노동 3권 보장하라. 셋째, 김영태는 물러가라. 넷째, 동일방직 사건 해결하라. 다섯째, 종교탄압 중지하라’ 등이었다. 농성자들은 출입문을 폐쇄하고 가족 면회도 거부한 채 투쟁을 계속했다. 동일방직 사건이 똥물 투척에 이어 무기한 단식농성으로 확대되자 당시 민주화 투쟁을 전개해 나가던 지식인·학생·종교인 등은 이 사건을 민주노조 탄압의 신호탄으로 파악하고 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지원했다. 각계각층으로부터 성명서와 조사보고서가 쏟아져 나왔고 종교계는 금식기도를 비롯해 단식으로 동조투쟁을 이어갔다. 3월20일에는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주최로 기도회를 열자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이날 김수환 추기경은 말로는 조국 건설의 역군이며 산업의 역군으로 불리는 여성 노동자들이 학대를 당하고 있는 현실을 질타했다. “정부, 노총, 섬유노조본부, 동일방직 회사에 호소합니다. 우리들이 산업의 역군이라고 부르는 노동자들, 그중에서 이번 사건에 희생된 여성 근로자들을 살리십시오. 이들을 살리는 길이 여러분이 사는 길이요, 또한 우리 모두가 사는 길입니다.” 기도회가 끝난 뒤에도 많은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단식농성장이 있는 건물 밑으로 몰려와서 찬송가를 불렀다.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 그날에. 오오 참맘으로 나는 믿네. 우리 승리하리라.” 정당한 노동조합 활동의 대가로 똥물까지 뒤집어쓰고도 죽기를 각오하고 끝내 노조를 지키리라 다짐하며 단식중인 여성 노동자들을 안쓰러워하며 시민들은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농성자들이 창틀에 매달려 밖을 내려다보자 그들은 함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동일방직 힘내라!” 다가가 손을 잡아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사람들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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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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