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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들어 1월 김영태 노총 위원장이 물러나는 등 ‘민주화의 봄’을 맞이해 이총각을 비롯한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은 본격적으로 복직 요구 투쟁에 나섰으나 여전히 길은 보이지 않았다. 사진은 그해 5월1일 해고자들이 한국노총에 들어가 농성을 하고 있는 모습.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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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80
1980년 1월1일 새해 첫 미사에 참석한 이총각은 왠지 가슴에서 돌덩이 하나를 덜어낸 듯 편안한 마음이었다. 동일방직 민주노조 조합원 124명의 해고가 단순히 노사간의 문제로 발생한 것이 아님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이제 그 원흉인 독재자가 죽었으니 아무리 유신잔재세력이 발악을 해도 박정희 때만큼이야 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총각은 자신에겐 유일한 ‘빽’인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세상 모든 노동자들도 평등하게 잘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 출발이 1980년이기를…. 노동자들에게도 ‘민주화의 봄’이 풍기는 향기는 충분히 신선하고 풍요로웠다. 그동안 꽁꽁 묶여만 있었던 단체행동권의 봉인을 풀고 파업과 농성, 시위 등을 전개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찾고야 말겠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4월21일 국내 최대 민영탄광인 동원탄좌 사북영업소에서 일어난 노동자 투쟁은 이후 억눌려왔던 노사문제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됐다. 24일까지 계속됐던 사북사태는 어용노조와 소폭의 임금인상에 항의해 노동자와 그 가족들 6000여명이 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사북읍이 치안공백 상태가 될 정도로 긴박했다. 그런 와중에 경찰관 1명이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는 등 유혈사태로 번지고 말았다. 계엄사령부는 31명을 구속하고 50명을 불구속기소하여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노동자의 울분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던 사북사태는 연일 계속되고 있던 대정부 시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동일방직 해고노동자들도 본격적으로 복직투쟁에 나섰다. 80년 1월16일 이총각을 비롯한 해고노동자 5명은 전국섬유노조 중앙집행위원회를 며칠 앞두고 김영태 노총위원장을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했다. 이유는 그가 지난해 8월14일 <문화방송>(MBC) 티브이에 출연해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여자이면서도 치부를 예사로 노출하고, 면도칼을 가슴에 갖고 다니며 자해행위를 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불순한 세력이며, 똥과 독침(해고 1돌 기념 은반지를 지칭)을 휴대하고 다니는 악질적인 인물들”이라고 발언한 내용 때문이었다. 김영태의 비리와 악행의 진상이 계속 드러나고 여론이 악화하자 한국노총 안에서도 그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화학, 금융, 운수, 외기, 관광, 철도, 전매, 체신 등 8개 산별노조 위원장들이 모여 노총에 대한 불신을 씻기 위해서는 김 위원장이 즉각 퇴진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1월19일 경기도 안양 노총회관에서 열린 섬유노조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김영태와 운명을 같이하는 우종환·박복례 등과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세력이 나뉘어 서로 인신공격을 해댔다. 위원들이 서로 나서서 와이에이치(YH)무역 지부 사태와 동일방직 문제에 대한 집행부의 잘못을 지적하며 공격하자 우종환이 고함을 질러댔다. “언제부터 그렇게 민주투사였고 언제부터 노동 투사였는지 모르겠네. 톡 까놓고 말해서 동일방직 때려잡자고 했을 때 똑같이 찬성하고 술 먹고 계집 끼고 돈 얻어 쓰고… 안 그런 놈이 여기 방용석 빼고 누가 있다고 떠드는 거야?” 결국 이날 회의에서는 참석 인원 22명 중 찬성 13, 반대 7, 기권 2표로 와이에이치지부와 동일방직 사태에 책임을 지고 섬유노조 위원장 이하 집행부가 총사퇴하자는 안건이 통과되었다. 이어 전국섬유노조 정상화추진위원회가 발족되어 성명서를 발표하자 노총 내부에서도 김영태에 반대하는 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드디어 2월8일 노총 의장단 회의를 통해 상임 부위원장이자 항만노조 위원장인 정한주가 위원장 직무대리로 위촉되었고, 김영태는 물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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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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