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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19 17:46 수정 : 2006.03.1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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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의 고도 이스터섬의 거석문명 붕괴는 남벌 등 환경파괴로 인한 문명몰락의 대표적 사례로 회자된다. 미국 하와이대학의 테리 헌트 교수 등은 <사이언스> 최근호에서 이에 강력한 반론을 제기했다. 이스터섬에 인간이 처음 도래한 것은 애초 추정보다 400년이나 늦은 1200년대이며, 유럽인이 이 섬을 발견한 1722년 이전 500년 동안 인구가 3만명까지 늘어날 수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원주민의 거석 조성과 경작을 위한 벌목 때문이 아니라, 유럽인이 질병을 퍼뜨리고 원주민을 노예로 잡아간 것이 이 섬을 피폐시켰다고 설명한다.

네덜란드의 야코프 로헤벤 제독이 1722년 이 섬에 도착했을 때 덩그러니 거석상만 남은 채 원주민들은 야만의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원주민들이 거석상에서 제례를 지내는 등 나름의 문화를 일구며 살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 섬의 결정적 피폐는 그때부터인 것 같다. 1805년 미국과 페루 선박들이 습격해 원주민을 노예를 잡아가고 천연두가 퍼져 1877년에는 생존자가 111명에 불과했다.

이스터섬 환경파괴론의 결정판인 <문명의 붕괴>의 저자 제러드 다이아몬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교수는 정작 실증적 연구에서 약간 다른 말을 한다. 그의 2004년 9월 <네이처> 논문은 ‘주민들이 특별히 환경을 파괴했다기보다는 태평양에서 가장 취약한 환경적 요인’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야자나무를 베어버린 뒤에는 빵나무나 타히티 밤나무 같은 대체재를 키울 수 없었던 섬의 고립이 가장 큰 요인이라는 것이다. 그가 <문명의 붕괴>에서 말하고 싶었던 바는 지구도 고립된 이스터섬과 마찬가지 것이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를 계속하라고 대법원이 판결했다. 문제는 공사를 지지하는 쪽도 매립한 새만금을 어떻게 할 것인지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이스터섬이야 거석상이라도 남겼지만, 새만금 공사는 무엇을 남길 것인가?

정의길 국제팀장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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