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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2.20 17:14 수정 : 2006.12.20 17:14

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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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그대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려 있구나. 어쩌면 좋을까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그대를 구하려는 것은 반역의 죄를 받게 될 것이니 ….”

야나기 무네요시가 서둘러 ‘사라지려는 조선건축을 위하여’를 집필(월간 <가이조> 1922년 9월호)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에게 광화문은 일본 고건축의 상징 에도성에 비교되는 것이었다. “가령 조선이 부흥하고 일본이 쇠약하여 마침내 조선에 합병됨으로써 …, 호수 너머 보이는 하얀 에도성이 헐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 누가 에도성의 죽음 앞에 슬퍼하지 않을까.”

그는 광화문을 “조선 아름다움의 권화”라고 평가했다. “얼마나 단순하고 태연한가. 실로 한 왕조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세워진 다시 없는 기념비”였다. 게다가 광화문은 멀리 북악을 배경으로 창연한 전각들 맨앞에 우뚝 서 좌우로 6조 관아를 거느린다. “자연과의 배치를 고려하여 계획된 그 건축에는 이중의 아름다움이 있다. 자연은 건축을 지키고 건축은 자연을 장식한다.” 이런 천연과 인공의 조화를 파괴하려는 총독부를 두고 그는 서슴없이 ‘무지한 자’ 혹은 ‘어둡고 강한 자’라고 지칭했다.

이전도 거부했다. “자연과 건축과의 조화에 유념한 옛 사람의 의도를 무시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형체는 남아도 생명 없는 송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일제의 지식인이지만 그 안목과 비판정신 앞에서, 80여년 만의 복원을 두고도 여전히 궁시렁대는 우리 모습이 부끄럽다. 그는 평소 민중의 손때 묻은 민예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수집한 생활자기, 목기 등이 처음으로 서울 일민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위대한 미를 낳은 민중”이라고 숭모한 사람들은 무관심하니 민망스럽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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