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7.02 17:49
수정 : 2007.07.0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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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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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영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세상이라지만, 영어 사전엔 없는 영어 외래어가 우리말 사전에 버젓이 오른 것이 있다. 대표적인 게 ‘커트라인’이다. 이희승 편저 〈국어대사전〉에는 영어 표기(cutline)와 함께 ‘끊어버리는 선. 합격선의 최저점’이라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한 인터넷 포털 국어사전 역시 ‘일정한 인원을 뽑는 시험에서 합격권에 든 마지막 점수’라고 설명했다. 영어 사전엔 복합명사 ‘cut-line’은 있지만, ‘cutline’은 없다. 그 뜻도 ‘(출판물의) 삽화에 곁들이는 설명문’이다. 우리가 쓰는 커트라인의 뜻에 맞추려면 ‘cut-off line’ 혹은 ‘cut-off point, minimum score to pass’(합격에 필요한 최저 점수)라고 해야 한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 사회에서 이 말의 무게다. 당락, 성공과 실패, 등용과 낙오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커트라인 밑이라면, 아무리 훌륭한 품성과 뛰어난 잠재력을 갖고 있어도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사법시험의 경우 0.01점으로도 당락이 결정되고, 대학 입시에선 수능 1점 차로도 대학과 학과가 결정되며, 사법연수원 순위는 판사 임용과 이후 승진과 보직을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당락뿐 아니라 서열 혹은 등급의 기준이 된다. 수학능력시험 성적을 적용한 커트라인은 대학 서열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정해진 대학 서열은, 기업이 학생을 평가하고 채용 여부를 결정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다. 어떤 대학의 커트라인을 넘었느냐에 따라 사회적 기회가 천차만별이다 보니, 학생은 재수 삼수를 주저하지 않고, 학부모는 수백 수천만원의 사교육비를 마다지 않는다. 이른바 선진국엔 단 1~2점으로 당락을 결정하고 등급을 부여하는 제도란 없다. 그러니 말도 없다. 어떻게 문제풀이 1~2점으로 인성과 잠재력을 평가할 수 있을까.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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