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7.25 17:27
수정 : 2007.07.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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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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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1980년대 초반 미국에선 대대적인 기업 인수합병이 이뤄지고 있었다. 경기가 나빠지고 부실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알짜 회사를 인수한 뒤 청산해 현금을 챙기는 경우도 있었다. 기업들은 방어책을 강구하기에 바빴다.
인수합병 전문 로펌의 마틴 립튼이란 변호사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적대적 인수합병 시도가 있을 때 기존 주주에게 싼값으로 신주를 발행할 수 있도록 해 공격자들의 지분을 희석시키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포이즌필(독약조항)이다. 한참 인기를 끌었던 포이즌필은 2000년대 들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경영 실적이 좋아지고 주가가 오르면서 적대적 인수합병의 위험이 준데다 경영진을 견제하려는 주주들의 반대에 부닥쳤다.
금융감독원이 포이즌필 도입을 주장하고 나섰다. 국내 기업들이 외국 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 위협에 시달리고 있으며,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42조원에 이르는 돈을 자사주 매입과 우호세력 확보에 쏟아붓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돈이 묶여 투자를 못한다는 주장이다.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 다르다. 우리나라에서 대기업이 적대적 인수합병에 희생된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성공한다 해도 잃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매출액 상위 1천대 기업의 사내 유보금도 무려 364조원에 이른다. 자본잉여금이나 이익잉여금으로 회사 안에 쌓여 있는 돈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한국’이란 주식회사가 있다. 시가총액은 1천억원이다. 이 회사는 42억원의 자사주와 364억원의 사내 유보금을 갖고 있다. 이 회사가 42억원의 자사주 부담 때문에 투자를 할 수 없는 상황일까?
기업의 고충을 헤아리는 것은 좋다. 그러나 세습경영을 하고 있는 몇몇 재벌기업들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게 금감원이 할 일은 아닐 것이다.
정남기 논설위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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