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8.08 17:29
수정 : 2007.08.08 17:29
|
정남기 논설위원
|
유레카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독일 사이에는 총성 없는 또하나의 전쟁이 있었다. 핵무기 개발 경쟁이다. 처음엔 독일이 앞섰다. 1938년 독일의 물리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중성자를 이용해 우라늄 235를 연쇄 핵분열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단순히 물질 구조를 연구하던 핵물리학이 거대한 핵에너지 개발 이론과 기술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전쟁이 터지면서 독일·영국·미국 등 강대국들에서는 본격적인 핵무기 개발전이 시작됐다.
미국 물리학은 독일보다 뒤졌다. 개발에서 앞선 것은 경제력 덕분이었다. 천연우라늄 속에 극히 조금씩 들어있는 우라늄 235를 뽑아 농축하는 과정에서는 천문학적 돈과 시설이 필요했다. 인종 탄압을 피해 유럽에서 건너온 과학자들의 합류도 핵무기 개발에 가속도를 붙였다. 이탈리아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대표적인 경우다. 유대인인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핵무기 개발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 핵무기 개발의 총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역시 독일계 유대인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불린 미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은 종전을 앞두고 1945년에 열매를 맺는다. 7월에 미국 로스앨러모스 인근 사막에서 최초의 핵실험이 있었다. 이어 8월6일 아침 8시15분 히로시마 상공에 우라늄 235로 제조한 원자폭탄 ‘리틀보이’가 투하됐다. 리틀보이는 히로시마 상공 580미터 지점에서 폭발했고, 일순간에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14만명이 숨졌다. 8월9일 나카사키에 또 한 발의 원자탄이 떨어졌다. 플루토늄 239를 이용해 만든 원자폭탄 ‘팻맨’이었다. 7만여명이 숨졌다.
히로시마에 이어 나카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9일로 꼭 62년이 됐다. 냉전이 끝나 핵무기 경쟁은 많이 줄었다. 그러나 아직도 지구상에는 2만7천여기의 핵탄두가 남아있다.
정남기 논설위원
jnamki@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