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9.06 17:56
수정 : 2007.09.06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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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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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1961년 4월12일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인류의 첫 우주인이 된 소련의 유리 가가린은 “여기서 보니 신은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나중에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던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시초프)가 지어낸 말로 드러났다. 정작 그 자신은 비좁은 우주선에 갇혀 1시간48분 동안의 비행을 소화하느라 멋진 말은커녕 숨 돌릴 틈도 없었을 것이다. 우주 탐험은 미국과 소련 사이의 체제경쟁 수단이었다. 가가린이 경쟁자를 물리치고 우주인으로 선발된 데는 기층계급 출신이라는 점과, 무엇보다 좁은 선실에 맞는 키 157㎝의 아담한 체격이 크게 작용했다.
그로부터 한 달도 되기 전인 5월5일 미국은 해군 출신인 앨런 셰퍼드가 탄 첫 유인우주선 프리덤 7호를 쏘아올렸다. 가가린과 마찬가지로 셰퍼드도 돌아와서 카퍼레이드를 벌이고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하는 국가영웅이 됐다. 그는 10년 뒤엔 아폴로 14호를 타고 달에 착륙했다. 처음으로 컬러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이 탐사에서 셰퍼드는 달 표면 골프를 시도해, 가가린에게 빼앗긴 ‘인류 최초’의 아쉬움을 달랬다.
가가린과 셰퍼드 이래 34개 나라에서 462명의 우주인이 나왔다. 이 가운데 미국이 295명, 러시아(옛 소련 포함) 97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연대를 과시하기 위해 1978년엔 체코의 블라디미르 레메크를, 1980년엔 베트남의 팜뚜언과 쿠바의 아르날도 멘데스를 소유스에 태워 우주로 보내는 선심을 썼다.
냉전이 붕괴된 뒤 2000년대부터 우주 개발은 급속히 상업화하고 있다. 우주관광 등 새로운 우주여행자들은 ‘우주인’과 구분해 ‘우주비행 참가자’로 불린다. 과학기술부는 이번에 탑승우주인으로 선정된 고산씨가 우주인에 속하는 ‘우주실험 전문가’로 분류된다고 밝혔다. 우주인 사업이 지나친 과학영웅 만들기로 흐르지 않고 원래 취지인 과학 대중화에 기여하길 기대한다.
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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