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9.12 18:24
수정 : 2007.09.12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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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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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서한 초기인 기원전 154년에 죽은 조조(晁錯)는 300년 뒤의 인물인 삼국지의 그 조조(曹操)와는 다른 사람이다. 서한의 조조는 오나라 등 제후세력이 한나라 중앙정부에 대항해 일으킨 ‘오초칠국의 난’으로 죽었다. 당시 반란군은 조조를 겨냥해 ‘황제 측근을 숙청한다’(淸君側)는 명분을 내걸었다. 제후들의 영지 삭감정책을 주도한 게 조조였기 때문이다. 애초 제후들을 견제하려 조조를 중용했던 경제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반란군 회유를 위해 조조를 처형했다. 그 뒤에도 반란군이 칼을 거두지 않자 경제는 뒤늦게 “후회막급”이라며 한탄했다. 자신의 정책을 펴나가는 측근을 뒷받침하지 않은, 어리석은 군주의 때늦은 후회다.
후한 멸망 전 100여년 동안, 황제 측근을 지키는 환관들이 크게 세력을 떨쳤다. 특히, 영제는 환관 조충과 장양을, 요즘말로 하면 ‘아빠’ ‘엄마’라고 불렀다. 그 정도로 그들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겼다. 당시의 일화다. 두 사람과 가까운 맹타라는 장사꾼이 있었다. 하루는 장양이 맹타를 불러, 원하는 것을 물었다. 맹타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충이 제게 절을 한 번 하게 해주십시오”라고 청했다. 부탁대로 장양의 집앞에 모인 청탁꾼들 앞에서 조충이 맹타에게 절을 하고 대문 안으로 공손히 인도하는 모습을 보인 다음부터, 맹타에게 뇌물이 쏟아졌다. 황제의 힘이 실린 권신은 조그만 몸짓 하나로도 이권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측근 비리’ 논란과 관련해 “할말이 없게 됐다”고 고개를 숙였다.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정윤재 전 의전비서관 얘기다. 그동안 노 대통령은 ‘적대세력’의 요구에 자신의 팔을 자르는 우를 범하진 않겠다는 생각이었을 게다. 그렇다고 무작정 측근을 싸고도는 것도 어리석긴 마찬가지다. 그렇게 비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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