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9.26 18:14
수정 : 2007.09.26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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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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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조선 영조 때 종7품 관리였던 이재 황윤석은 서울 생활 5년 만에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향했다. 음력 5월18일, 길을 나선 그는 여우고개(지금의 남태령)를 넘어 과천과 하류천점(지금의 수원시 세류동)을 지나 서울에서 120리 거리인 진위(지금의 평택시 진위면)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이어 천안과 공주에서 하룻밤씩을 지낸 그가 고향인 전라도 흥덕현(지금의 전북 고창군 흥덕면·성내면·신림면 일대)에 닿은 것은 5박6일째인 5월23일이었다. 당시 한양에서 흥덕까지는 걸어서 7박8일이 걸리는데, 그나마 관마를 빌려 탄 덕분에 시간을 줄였다. 한 달 동안 꿀 같은 휴가를 보낸 황윤석은 윤5월18일 귀경길에 올랐다. 그는 더위와 뒤이은 큰비에 시달리다 24일에야 서울로 돌아왔다. 6박7일 만이었다.(최기숙 외 <역사, 길을 품다>)
황윤석이 휴가를 다녀온 영조 46년(1770년)은 그나마 도로망이 정비된 때였다. 도로가 애초의 행정·군사 목적 외에 통상로 기능을 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같은해 간행된 <동국문헌비고> ‘시적고’에는 전국의 장시가 1064곳으로 나와 있다. 이 숫자는 20세기 초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역시 같은해 간행된 신경준의 <도로고>를 보면 전국의 도로망은 서울에서 의주·경흥·평해·동래·제주·강화에 이르는 6개 대로와 여기서 나뉘는 중로·소로로 돼 있다. 이들 길은 장시를 연결해 주는, 일종의 혈관이었다. 간선도로는 더 늘어, 철종 12년(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10대로로 정리된다. 황윤석이 오갔던 길은 제주로 가는 해남대로였다.
도로가 많이 확충됐다는 요즘도 귀향길, 귀경길은 여전히 고생스럽다. 추석 이틀 전인 지난 23일 아침 7시 서울을 출발한 승용차가 전북 고창에 닿는 데 7시간 넘게 걸렸다. 귀경길은 그보다 훨씬 힘들었다. 230여년 전보다는 낫다는 데 위안을 삼아야 할까.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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