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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0.17 18:17 수정 : 2007.10.17 18:17

정남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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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과 심판자의 경계가 프랑스 혁명 때처럼 모호했던 적도 없다. 1792년 10월 왕정이 무너진 뒤 프랑스 혁명정부는 우파 지롱드당과 좌파 자코뱅당이 주도했다. 로베스피에르·당통·마라는 자코뱅당의 핵심이었다. 루이16세 재판을 둘러싼 대립이 자코뱅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혁명 주도세력 중 하나였던 지롱드당 사람들은 순식간에 죄인 신세로 전락했다. 이들은 루이16세와 함께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고, 자코뱅당 산악파가 주도하는 공포정치가 시작됐다.

마라가 암살된 뒤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정부의 공안위원회를 장악하면서 공포정치는 극에 달했다. 그러나 자코뱅당은 좌파 에베르와 우파 당통의 대립으로 다시 내분에 빠졌다.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쿠데타를 준비하던 에베르파와 당통파를 잇달아 체포해 단두대에 세우는 데 성공한다. 적과 동지를 분간할 수 없고 오직 권력을 잡은 자만이 심판자 구실을 하게 된 것이다.

공포정치의 희생은 엄청났다. 한 달 평균 60∼70명이던 처형자는 94년 6월 700명에 육박했다. 이런 로베스피에르의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인 태도는 다수의 반대파를 만들어냈다. 반혁명 세력으로 몰릴 것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결집해 세력을 형성했고, 이들의 반격으로 로베스피에르는 실각했다. 수천명을 형장에 보냈던 로베스피에르 역시 ‘반혁명 분자들과 귀족들을 보호하고 애국자들을 박해했다’는 이유로 처형됐다. 100여명의 추종자들도 같은 죄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대통령 후보 경선 이후 오랜만에 불편한 마음을 털어놨다. “저를 도운 것이 무슨 죄인가요. 임기가 남았는데도 제거하고, 한직으로 보내고, 잘라내고 ….” 답답하니까 해본 소리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투쟁의 결과에 따라 정치적 심판자와 죄인이 갈리는 현실은 변함이 없나 보다.

정남기 논설위원 jnam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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