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0.22 18:02
수정 : 2007.10.2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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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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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기자실이 제도화된 건 공교롭게도 언론의 자유가 극도로 위축됐던 박정희 정권 때였다. 이승만·장면 정권 때도 기자실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부처별 기자실(단)과 공보관 제도는 1967년 박 대통령이 도입했다. 접근 자체가 허용되지 않던 청와대도 개방해 공보비서관과 기자실을 두었다.
박 대통령은 이와 함께 1972년 프레스카드 제도를 도입했다. 중앙일간지 기자 임명권을 사실상 정부가 행사하는 제도였다. 각 언론사가 신청하면 문화공보부는 신원조회를 거쳐 프레스카드 발급 여부를 결정했다. 발급이 거부된 사람은 일간지 기자를 포기해야 했다. 청와대 출입기자는 아예 청와대가 지명하기도 했다. 굴욕적이었지만 언론사와 기자에게는 독점적 정보 접근권이라는 당근이 주어졌다. 언론사엔 특권이었고, 정부에겐 효율적인 보도통제 수단이었다. 기자단만 막으면 비판적 보도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런 거래는 대개 기자실에서 이뤄졌다.
기자실 ‘탄압’은 공교롭게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시작됐다. 1995년 김두관 남해신문사 사장은 경남 남해군 민선 군수로 당선되자마자, 기자실을 폐쇄하고 계도지를 없앴다. 행정과 언론이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투명해질 수 있다는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 지역언론은 군정소식 보도 거부 등으로 맞섰지만 기자실을 되찾지는 못했다. 공무원노조의 전신인 공무원직장협의회는 남해군 사례에 자극을 받아, 협의회 초창기부터 기자실 폐쇄 운동을 벌였다. 이후 경남에서만 사천·김해·통영 등의 자치단체가 기자실을 없앴다. 기자실도 많이 투명해졌다.
기자실 폐쇄를 놓고 중앙정부와 언론의 힘겨루기가 계속되고 있다. 기자들은 국민의 알권리를 앞세워 브리핑 거부 등 다양하게 저항한다. 그런데 기자들은 안다.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켜 줄 뉴스는 기자실 바깥에 숨겨져 있고, 안에는 홍보성 정보만 있다는 것을.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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