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2.03 18:48
수정 : 2007.12.03 18:48
|
곽병찬 논설위원
|
유레카
강토의 주인이었던 임금에게도 비자금은 필요했다. 왕실 경비가 국가 예산에 책정되긴 했지만, 사용처를 꼬치꼬치 밝혀야 하기 때문에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었다. 중전, 비빈은 물론 조정의 대소 신료를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 즉, 시쳇말로 기밀비 접대비에 해당하는 돈은 따로 필요했다.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비자금은 풍족했다. 그건 순전히 태조 이성계 덕택이었다. 그는 고려말 여러 차례 공신에 책봉되면서 수많은 노비와 전답을 하사받았다. 한때 함경도의 절반이 그의 재산이었다고 한다. 태조 서거 후 태종은 이 재산을 내수소라는 기구를 두어 관리토록 하고, 거기서 마련된 돈을 비자금으로 썼다. 그것이 내탕금이다. 세조는 내수소를 내수사로 확대개편하며, 소금이나 홍삼 따위의 전매사업도 관장하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왕은 최고의 부자였다. 국가 조세체제를 위협할 정도로 내수사의 부작용이 커지자, 조선말 고종은 내수사를 폐지한다. 하지만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의 리베이트로 내탕금을 조성해 썼다.
왕실 재산이라지만, 내탕금을 쓰는 데도 법도는 있었다. 영조·정조 등은 흉년이 계속되면 내탕금을 풀어 구휼토록 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할 때도 내탕금 1만냥을 내어 그 비용으로 썼다. 주민 이주비는 물론 묘소 주변 소나무 500그루, 능수버들 40그루 이식 비용도 여기에서 썼다. 고종은 자신이 거처할 건청궁을 내탕금으로 지었으며, 이준 열사 헤이그 파견 비용도 내탕금에서 댔다. 조선 소유의 유일한 해외공관이었던 주미 워싱턴 공사관 건물도 고종의 내탕금 2만5000달러로 구입했다.
멋대로 조성하고 썼다가는 동티가 났다. 사도세자는 동궁전 내탕금을 탕진했다가 영조의 미움을 사기 시작했다고 하며, 연산군은 아예 왕위에서 쫓겨났다. 고금이 다르지 않다. 요즘 비자금 때문에 삼성의 황제 경영이 흔들리고 있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