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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2.06 18:53 수정 : 2007.12.06 18:53

함석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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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 14번은 <죽음과 소녀>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죽음의 신은 한 소녀를 제물로 삼으려 하고, 소녀는 삶을 애원한다. 죽음의 신은 “내 품안에서 편하게 쉬게 해주겠다”며 결국 소녀의 목숨을 거둔다. 이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남미 독재정권의 고문기술자는 한 대학생을 전기고문하고 성폭행한다. 로만 폴란스키의 1994년 영화 <진실>의 한 부분이다. 15년이 흐른 뒤, 주인공은 우연히 고문기술자를 만나 치떨리게 고대하던 복수의 순간을 맞는다. 마지막 순간에 와서야 고문기술자는 죄를 고백한다. 주인공은 이상하게 마음이 풀리며 그를 용서하기로 한다. 주인공은 자신이 정말 추구했던 것은 그의 목숨이 아니라 진실이었음을 깨닫는다.

‘법의 정신’의 한가운데 ‘실체적 진실 추구’라는 게 있다. 당사자의 합의를 인정하는 형식적 진실을 추구하는 게 민사사건이라면, 형사사건에서는 이 문구가 수사 이념의 바탕을 이룬다.

검찰은 그제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에게 무혐의 결정을 내리면서, 사건 실체의 97%를 복원했다고 밝혔다. 나머지 3%는 뭐냐는 질문에 “우리는 실체적 진실을 추구한다”고 에둘러 대답을 했다. 진실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이해하려 든다면 3%의 무게는 실체적 진실이란 말에 숨어 있는 한계쯤으로 읽힌다. 인간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순백의 진실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논리가 타당성을 얻으려면 인간의 합리적인 눈으로 볼 때 의심 없는 고도의 개연성이 있어야 한다. 공직선거법상 유독 이 후보의 자격이 문제될 수 있는 부분에서 ‘혐의를 찾을 수 없었다’는 모호함은 법률적 용어 세탁을 거쳐 ‘혐의 없음’이 됐다. 입원 중이라는 이유로 핵심 관계자 조사도 누락하고 내놓은 이 실체적 진실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우리가 그를 용서할 기회조차 사라지는 것일까?

함석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sj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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