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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2.13 19:39 수정 : 2008.02.13 19:39

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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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즉위 직후인 1776년 4월1일치 실록을 보면 이덕사·박상로 등의 옥사에 관한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국문을 받던 환관) 김수현에게 ‘남한당(南漢黨), 북한당(北漢黨), 불한당(不漢黨)’ 이라는 말에 대해 물었다. 대개 영종(영조) 만년에 분당의 조짐이 생겨 김한구(金漢耉)와 친밀한 사람을 ‘남한당’이라 하고, 홍봉한(洪鳳漢)과 친밀한 사람을 ‘북한당’이라고 하였으며, 북한당이나 남한당에 들지 않은 사람들을 ‘불한당’이라 하여 ….”

김한구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아버지이고, 홍봉한은 정조의 외할아버지다. 외척인 두 사람의 이름에 ‘한’(漢)자가 있어 남한당·북한당이라 했다지만, 당시의 동당(東黨)·중당(中黨)과 함께 남당·북당이라고도 했다. 홍봉한의 집이 김한구의 집보다 북쪽에 있어 그렇게 불렸다는 말도 있다. 붕당정치의 초기인 1575년 요직을 놓고 다툰 김효원과 심의겸이 각각 지금의 동대문시장 근처와 정동에 살아 그들로 대표되는 세력을 동인·서인이라 했던 것과 비슷하다.

남당·북당은 서인의 주류인 노론의 압도적 우위가 굳어진 때 형성됐다. 영조가 혼인을 통해 온건한 노론계 대신을 중심으로 지지세력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힘을 얻은, ‘척신당’(戚臣黨)들이다. 양쪽 다 명분으로는 ‘세손(나중의 정조) 보호’를 내세웠다. 상대적으로 남당이 ‘노론의 우위’, 곧 조정의 공론을 앞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올해 들어 공무원 사회에도 동인·서인이란 말이 나돈다고 한다. 광화문을 기준으로 동쪽인 삼청동에 있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동인, 서쪽인 통의동의 대통령 당선인 사무실은 서인이 된다. 연초엔 동인이 각광을 받았지만, 요직 인선이 시작되면서 서인으로 힘이 쏠렸다는 말도 있다. 서인 안에서도 당선인과의 관계에 따라 힘의 부침이 있다고 한다. ‘측근당’ 다툼의 시작이 아니길 바란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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