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3.26 18:47
수정 : 2008.03.26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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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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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에도시대(1603∼1868) 일본이 자급자족 경제에서 상품경제로 전환하는 계기 가운데 하나로 18세기 초 오사카 주변 옛 야마토강의 수로 변경 대공사가 꼽힌다. 이 공사로 조성된 1천㏊의 신기전(新起田), 곧 새로 개간한 땅에는 대규모 면화재배 단지가 많이 들어섰다. 면화를 가공하면 쌀의 몇 배 수익을 올린다는 사실이 여기서 확인되면서, 전국적으로 면화 농사가 확대됐다. 이어 무명 소비가 늘어나면서 염료인 쪽이 인기상품이 됐고, 비료인 청어 깻묵을 구하느라 홋카이도까지 장삿길이 넓어졌다. 농업혁신이 상품경제를 이끈 주역이 된 셈이다.
이웃 조선에는 화성 대유둔(大有屯)이 있다. 18세기 말 진목천을 막아 대형 저수지 만석거를 만들면서 개간한 대유둔은 측우기와 수문·갑문·수차 등을 활용한 최첨단 시범농장이었다. 정조는 또 화성 상가에 입주할 상인에게 무이자 대출과 비과세 혜택을 줬다. 화성 축성도 부역이 아닌 임금노동으로 했으니, 경기 활성화도 함께 꾀한 셈이다. 농업혁명과 상업혁명을 함께 이루려던 구상이다.
그렇지 않아도 조선에선 17세기 말부터 상업적 농업경영이 활성화됐다고 한다. 금속화폐도 일상에서 널리 쓰였고, 1830년께는 전국 장시의 90% 가까이가 10일·15일장이 아닌 5일장이었다. 그만큼 유통 규모가 커진 탓이다. 한 해에 고작 4∼5차례 뱃길로 이어지는 곳이 많았던 당시 일본의 장삿길보다 크게 못할 게 없었다.
사실, “메이지시대 이후 일본의 근대화는 에도시대에 축적됐던 역량, 그리고 조선으로부터 전수받은 문물이 없었더라면 절대로 이룩할 수 없었다.”(와키모토 유이치 <거상들의 시대>) 에도시대 농업 생산력을 높인 ‘벼훑이 탈곡기’의 기반이 된 골풀무 제철 기술, 세계통화인 은의 대량생산을 이룬 신기술 ‘단천연은법’ 등도 조선에서 건너갔다. 일제 식민으로 조선이 근대화됐다는 한국 ‘뉴 라이트’들의 주장이 무색하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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