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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27 22:04 수정 : 2008.04.27 23:59

함석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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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때를 가끔 생각한다. 도시생활에 힘든 나에게 그 기억은 늘 고향이고 그리움이다. 할아버지는 농사를 지었다. 어둑한 새벽 할아버지의 아침은 ‘어험’ 하는 기침소리와 트랜지스터 라디오 기상정보로 시작됐다. 흰고무신에 적삼을 두르신 뒤 자전거에 삽을 걸고 논으로 나가셨다. 짐받이는 신문지와 비료포대로 싸서 푹신했는데, 할아버지는 그 위에 졸라대는 나를 싣고 나가신 날도 많았다.

논에 가면 늘 논두렁 물꼬부터 손보셨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엔 한밤중에도 나가 물꼬를 트셨다. 물을 머금은 두렁이 할아버지 삽을 받으면 쩍쩍하고 소리를 냈고, 논의 진흙을 밟으면 발가락 사이가 간지러웠다. 난 그 소리와 느낌이 좋았다. 할아버지는 수첩에 하루도 빠짐없이 그날 날씨와 모판 파종 날짜, 비료값, 농약 친 날짜 같은 것들을 깨알 같은 글씨로 적었다. 할아버지는 논에 물을 댈 때 쓰는 자새(무자위)를 밟아 돌리거나, 탈곡이 끝나고 논에 떨어져 있는 이삭을 주워오면 동전을 주셨다. 커서는 할아버지가 남긴 수첩에서 ‘나락(이삭) 손주 5원’이란 글씨를 발견하고 눈물을 쏟은 적도 있다. 자라면서 반 농군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내려가서 농사나 짓자”라는 흔한 말은 하지 못하고 산다. 농사는 정성이라는 말을 아직 믿는다.

땅투기 의혹을 받던 청와대 한 수석은 농사를 지었댔다. 거짓임이 드러나자, 법을 몰랐다고 되레 하소연했다. 차라리 “남들 다하는 투기 나도 좀 했다”고 했으면 조금은 나았을까? 가끔 주말에 들러 좋은 공기도 마시고, 부동산에 들러 오른 땅값도 확인하는 ‘웰빙 생활’을 했다고 했으면 나았을까? 청와대 벗어나면, 언제고 샀던 땅 10분의 1도 안 되는 반마지기 농사라도 지어보는 게 어떨까 싶다. 빛이 바래가지만 아직도 농지는 농사를 짓는 사람 것이어야 한다. 헌법 제 121조 1항(경자유전)이다.

함석진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위원 sj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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