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6.02 20:44
수정 : 2008.06.02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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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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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헨리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서 독립생활을 하던 1846년 7월 어느 날, 불시에 찾아온 사법경찰관이자 세리인 샘 스테이플스로부터 인두세 독촉을 받았다. 소로는 노예제를 묵인하고 멕시코를 침략한 정부에 항의해 6년 동안 인두세를 내지 않던 터였다. 그는 이번에도 납부를 거부했고, 곧바로 유치장에 감금됐다. 명저 <시민의 불복종>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그 내용은 “불의가 당신에게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단연코 그 법을 어기라”는 소로의 말로 요약된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뒤인 1858년 미국 오하이오주 중북부 지역의 작은 마을 오벌린 공동체에선 주민 21명이 투옥됐다. 도망친 노예 존 프라이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그를 체포해 압송하던 체포대로부터 프라이스를 빼돌려, 캐나다로 탈출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연방법은 도망친 노예는 반드시 주인에게 송환하도록 하고 있었다. 이 법규에 대해 오벌린 대학 총장이자 오벌린 공동체를 이끌던 찰리 피니는,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무효와 함께 불복종 선언을 했다. 그 후 피니의 지도에 따라 오벌린 공동체는 도망친 노예들을 보호하고, 탈출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1955년12월,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는 버스의 백인 전용 좌석에 앉았다. 백인들은 뒤로 가라고 강요했지만 파크스는 거부했고, 흑백분리법 위반으로 투옥됐다. 흑인 사회를 중심으로 이 법 불복종 운동이 광범위하게 벌어졌고, 수많은 사람이 투옥됐다. 연방 최고법원은 이듬해 이 법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소로는 감옥을 “노예의 나라에서 자유인이 명예롭게 기거할 수 있는 유일한 집”이라고 말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선 닭장 투어가 유행한다. 불복종 운동사에 기록될 또 하나의 금자탑이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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