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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7.16 21:12 수정 : 2008.07.16 21:12

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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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10년인 1504년 7월19일, 외척 신수영이 임금에게 그날 새벽 자신의 집에 던져졌다는 투서 석 장을 은밀히 보고했다. 언문, 곧 한글로 쓰인 투서는 각각 ‘임금이 신하를 파리 머리 끊듯 죽이니 오래가지 못하리라’, ‘임금이 여자를 가리지 않고 색을 밝히니 무도하다’, ‘언제나 이런 대를 바꿀까’라는 내용이었다.

연산군은 도성 문부터 닫아걸었다. 성벽 위에도 내관과 군사를 세워 사람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지금으로 치면 무차별 출국금지다.

그 뒤의 일은 더 가관이다. 다음날인 7월20일 임금은 언문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쓰지도 말라고 명령했다. 글을 아는 자를 고발하지 않으면 이웃까지 벌하도록 했다. 소통 수단을 막으면 민심 이반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이어 7월22일엔 한글로 토를 단 한문서적까지 불태우도록 했다. 7월25일엔 도성 안에서 한글과 한자를 아는 자들의 필적을 죄다 모으도록 했고, 그 뒤 여러 날 동안 정승과 승지, 금부 당상들이 이를 투서의 필적과 대조했다. 국가기관이 총동원된 셈이다.

‘익명서’로 불린 이 사건의 파장은 길었다. 연산군은 무시로 수사를 채근했다. 조사가 뜻대로 되지 않자, 자신이 죽이거나 쫓아낸 사람들의 자녀, 종, 친구, 심지어 사돈이 투서를 던졌을 것이라며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나중엔 7~8살 아이와 병자까지 고문했다. 이런 광기는 1506년 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서야 끝났다.

검찰이 조선·중앙·동아일보 광고 불매 운동과 관련해, 댓글을 단 누리꾼까지 모두 처벌하겠다며 수사확대 방침을 밝혔다. 무차별 압수수색도 벌어졌다. 여러모로 500여년 전 조선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하긴,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광고 불매 게시글을 삭제하도록 한 것도 ‘디지털 분서갱유’라고 할 만하다. 그런 도돌이표 역사의 끝은 어딜까.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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