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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7.23 21:45 수정 : 2008.07.23 21:45

정영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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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등은 무방비 상태다. 등을 치거나 찌르는 배신은 ‘심리적 퍽치기’라고 할 수 있다.

삼성 사건 1심 재판부가 기존 판례와 법리까지 무시한 채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다. “죄를 저질러 받는 죗값이 죄를 통해 얻은 이익보다 커야 한다. 그게 경제정의”라고 큰소리쳤던 재판부였기에 배신감을 안기고도 남았다. 재판부가 애초 특검의 기소가 잘못됐다고 화살을 돌리자 이번에는 특검이 반박하고 나서 장외 설전이 벌어졌다. 진실을 밝히겠다며 신청하지 않은 증인까지 채택하고도 관대한 판결을 내린 재판부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특검이 발끈했다.

삼성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일련의 배신이다. 내부 고발이라는 ‘조직의 배신자’에 의해 뇌관이 터졌다. 특검은 의지 박약에 부실 수사로 국가기관에 대한 배신감을 안겨줬다. 재판부는 정의의 마지막 보루가 될 것이란 기대를 배반했다. 배신의 뿌리는 회삿돈을 쌈짓돈으로 만들고 세금을 떼어먹은 대주주와 그 수하들의 배임행위에 있다.

배신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으로, 동물 세계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배신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배신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이득이 배신한 사람에게 돌아가는가, 다른 집단에 돌아가는가, 아니면 공공의 이익이 되는가. 공공의 이익을 꾀하는 배신은 사람한테만 있다고 한다. 그것은 ‘아름다운 배신’이다.

그런데 배신이라는 말이 남용되는 경향이 있다. 툭하면 ‘어떻게 니가 나한테 이럴 수가?’ 배신감을 토로한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행동은 동기부터 이해하는 반면, 타인의 행동은 현상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배신당했다는 감정이 불필요하게 생겨난다. 남의 행동을 동기부터 이해하면 배신 과잉이 줄어들 것이다. 배신을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배신감을 토로하는 것도 배신의 과잉이요, 남용이다.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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