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8.13 21:11
수정 : 2008.08.13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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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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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1963년 6월10일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워싱턴 아메리칸 대학에서 ‘평화를 위한 전략’이란 연설을 했다. 케네디는 연설에서 핵전쟁의 위험을 말하면서, 미국은 핵실험을 중단할 것이며 다른 나라가 핵실험을 하는 경우에만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케네디의 연설은 소련 탄도미사일의 쿠바 배치와 미국의 대쿠바 봉쇄로 팽팽하게 긴장됐던 쿠바 위기 뒤 불과 6개월 만에 나온 것으로, 당시로선 파격적인 화해 제의였다. 소련 공산당 기관지 <이즈베스티야>는 이 연설을 그대로 실었다. 이어 소련과 미국은 유엔 내 현안에 대해 하나씩 양보하는 조처를 주고받았다. 흐루쇼프(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전략 폭격기의 생산 중단을 발표했다. 7월엔 부분 핵실험 금지조약이 모스크바에서 체결됐고, 우주 협력과 영사관 상호개설 문제도 논의됐다.
이런 역동적 화해 분위기는 그 해 11월22일 케네디 암살 이후 사그라들었다. 케네디의 제안이 국내 정치적 목적이라거나 중-소 반목을 부추기려는 것이었다는 해석도 있다.(미하엘 쿤치크 <국가이미지 전쟁>) 하지만 이 몇 달은 냉전 시기 드물게 미국과 소련이 소통에 성공했던 한때였다. 미국의 사회학자 아미타이 에치오니는 이를 ‘케네디 실험’이라고 일렀다. 긴장과 경쟁의 악순환, 의사소통의 장벽을 일방적 ‘선물’로 깨뜨리고, 호혜적 조처로 보상을 받으면서 신뢰를 쌓아가는 이른바 점진적 접근 전략을 부분적이나마 시도했다는 것이다. 이는 ‘죄수의 딜레마’, 곧 협력하면 서로 이익이 되는데도 서로 믿지 않는 바람에 모두에게 불리한 결과를 선택하게 되는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남북 대치가 이어지고 있다.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은 한 달 넘게 해결의 실마리를 못 찾고 있고, 외교무대에선 꼴사나운 싸움도 벌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이런 딜레마를 벗어날 방안을 내놓을 수 있을까. 케네디는 아니라도 결단이 필요한 때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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