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8.25 19:29
수정 : 2008.08.25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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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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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야간 통행금지 해제 직후인 1982년 2월, 한국의 첫 심야영화 <애마부인>이 스크린에 걸렸다. 몰려든 관객으로 극장 유리창이 깨지는 소동을 빚은 이 영화는 무려 넉 달에 걸쳐 관객 31만명이라는 당시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이후 <젖소부인> <변강쇠> 등 에로영화가 쏟아졌다. 컬러 티브이가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고, 도시 곳곳의 여관 단지에선 브이티아르 야동으로 손님을 끌어모았다.
<애마부인> 개봉 1개월 뒤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선 한국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렸다. 엠비시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가 맞붙은 개막전 시구는 전두환 대통령이 했다. 이듬해 3월 민속씨름대회가 개막됐고, 5월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프로축구가 출범했다. 겨울에는 점보시리즈(농구)와 백구의 대제전(배구)이 열렸다. 대한민국의 낮은 스포츠로, 밤은 야동과 섹스산업으로 덮였다. 이른바 3S(스포츠·스크린·섹스)에 의한 우민화 정책은 전두환의 이데올로그였던 허문도의 작품이었다.
2000년 전 인간의 야만성을 극도로 자극하는 검투로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한 로마시대에도 창궐했던 정책이다. 현대에 와선 남미와 아시아의 독재정권들이 즐겨 써먹던 것이었다. 그런데 후기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3S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스포츠는 단순한 오락에서 고립된 개인에게 공동체 의식을 심어주고 결속시키는 네트워크 기능을 하고, 스크린은 표현과 상상력의 총아가 되었으며, 섹스는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거부하고 불평등에 맞서는 저항의 아이콘으로 기능하기도 했다. 일상에서도 3S는 건강하고 문화적인 삶의 잣대이자 개인의 경쟁력을 결정짓게 됐다.
오죽하면 그랬을까마는, 정부는 올림픽 선수단까지 정치적 퍼레이드에 이용했다. 전두환도 혀를 내두르겠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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