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8.26 19:57
수정 : 2008.08.26 19:57
|
여현호 논설위원
|
유레카
1968년 1월23일 미 해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원산 앞바다에서 북한 경비정에 나포됐다. 원산항 폭격이 거론되는 등 긴장이 높아졌지만, 베트남전의 수렁에 빠져 있던 미국으로선 또 전쟁을 벌일 처지가 아니었다. 미국은 나포 지점이 공해상이라고 주장했지만, 유엔해양법에 따르면 원산 앞 여도에서 12마일 이내이니 북한 영해였다.
미국으로선 승무원들을 송환받으려면 북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 말곤 다른 선택이 없었다. 억류된 승무원들은 영해 침범과 첩보 행위를 공개 시인해야 했다. 그런데, 그 방식이 묘했다. 승무원들은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를 얼마나 깊이 침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아무리 경미한 침범이라고 해도 행위를 완성하기에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이는 미국에서 강간을 법적으로 정의할 때 쓰는 표현이었다. 승무원들이 북한 쪽에 내놓은 항해지도에는 푸에블로호가 시속 2500마일이라는 엄청난 속도로 운항한 것으로 돼 있었다. 잘못했다면서도 상대를 조롱한 셈이다.
미국 정부도 묘안을 찾아냈다. 그해 12월23일 미국 대표인 길버트 우드워드 소장은 영해 침범을 시인하고 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하는 사과문에 서명하기 앞서 “사과문의 내용에 동의해 서명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성명을 낭독한 뒤 펜을 들었다.
불교계가 오늘 예정대로 정부의 종교 편향에 항의하는 범불교도대회를 연다고 한다. 정부가 이를 말리려 사과나 여러 약속을 했지만, 불교계의 마음을 헤아리는 진정성이 없다고 본 탓이다. 심리학자인 이민규 아주대 교수는 진실한 사과에는 잘못의 확실한 인정, 상대가 납득할 수 있는 표현, 재발 방지와 보상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때를 놓치지 말고, 상대의 감정에 공감을 표시해야 한다고도 말했다.(<1%만 바꿔도 세상이 달라진다>) 이명박 정부는 그런 진정한 사과 대신 적대적 국제관계에서나 있음직한 형식적 사과에 그친 건 아닐까.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