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9.03 21:36
수정 : 2008.09.03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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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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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던 밀턴은 부부가 정신적으로 불일치할 경우 이혼을 해도 무방하다는 주장을 편다. 17세기 영국 법률은 간통이나 불감증이 아닌 경우 이혼을 허용하지 않고 죄악시했기에 밀턴은 난봉꾼이나 다름없는 이혼자라는 오명을 평생 감수해야 했다. 수모를 겪으면서 밀턴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에 눈을 뜨고, 언론·출판 자유의 경전인 <아레오파기티카>를 펴낸다.
‘검열 없는 출판의 자유를 위해 잉글랜드 의회를 상대로 작성한 존 밀턴의 연설문’이란 부제의 팸플릿에는 인쇄업자도 판매업자도 없고 밀턴 자신의 이름만 명기했다. 검열제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었다. 밀턴은 가톨릭 종교재판소에서 비롯된 검열제의 비효율성과 해악을 조목조목 적시하고, 새로운 진리의 발견을 위해서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진리는 전투를 수행 중에 있으며 검열과 금지 조처를 취한다면 그것은 부당하게도 진리의 힘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와 거짓으로 하여금 서로 맞붙어 싸우게 하자. 자유롭고 공개적인 경쟁에서 진리가 패배하는 일은 결단코 없으며, ‘진리의 논박’이야말로 거짓에 대한 최선의 억압이며 가장 확실한 억압이라는 것이다.
한 세기 뒤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영국이 부박한 풍조 속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잃어가는 것을 개탄하며 ‘밀턴, 그대야말로 우리 시대에 살아 있어야 했다’고 노래한 소네트를 써서 밀턴에게 바쳤다. 올해 탄생 400주년을 맞은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는 우리 시대에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국가에 대해서 건전한 조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고 할 의지가 있는 사람이 칭송을 받을 때, 그리고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할 의지도 없는 사람이 침묵을 지킬 수 있을 때, 이것이 진정한 자유다. 한 나라에 이보다 더 큰 정의가 있을 수 있겠는가?”
정영무 논설위원
yo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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