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9.22 19:49
수정 : 2008.09.22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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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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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8사단장과 국방대학원장 등을 역임하고 중장으로 예편한 그가 유고를 남긴 것은 “4·3 기록이 너무 왜곡되고 미군정과 경찰의 실책과 죄상이 은폐되는 데 공분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고가 가필되지 않은 그대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을 때 역사 앞에 밝히라”고 당부했다. 4·3의 진실을 알리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1947년 경찰의 3·1절 민간인 발포에 분노한 제주도민의 총파업, 그리고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 선풍으로 민심이 끓고 있을 때인 9월 제주도 9연대로 배치돼 이듬해 2월 연대장으로 승진한다. 4월3일 남로당 무장대가 경찰지서 등을 기습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군정 당국은 군·경에 토벌작전을 명한다. 그러나 그는 “극렬분자는 200~300명에 불과한 만큼 화평 귀순 선무작전을 시도하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토벌해도 늦지 않다”며 군정 당국을 설득했다. 결국, 그는 4월28일 가족을 인질로 잡혀둔 채 무장대 은신처로 들어가, 책임자 김달삼과 담판을 벌여 평화협정을 끌어낸다.
하지만, 경찰 수뇌부는 평화를 원치 않았다. 사흘 뒤 경찰의 끄나풀들에 의해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하고, 경찰은 이를 무장대 소행으로 돌린다. 그는 조작의 증거를 들이대며 반박했지만, 빨갱이 자손이라는 누명만 뒤집어쓰고 전출된다. 이후 초토작전이 벌어지고, 2만5천~3만명이 희생된다. 대부분 민간인이었고, 어린이 노인 여성이 3분의 1이었다.
그가 유고에서 기술한 4·3 사태의 성격은 이렇다.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 폭동이라고 본다. 누구 하나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했다면, 극소수의 인명 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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