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0.08 20:53
수정 : 2008.10.08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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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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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조선 후기 대사헌을 지낸 이희준의 <계서야담>에 순조 때 경북 영천의 박씨 과부 자살 사건이 실려 있다. 박씨는 그를 탐낸 이웃 김조술이 “박씨는 나와 사통해 임신한 지 벌써 네댓 달이다”라고 소문을 내자 관에 억울함을 호소했다가 무참하게 외면당했다. 박씨는 관청 문앞에서 칼로 자결한다. 김조술 쪽은 박씨의 행실을 비난하는 글을 만들고, 돈을 풀어 박씨가 임신을 부끄러워해 약을 먹고 죽은 것으로 사건을 조작했다. 그러다 박씨의 충직한 종이 임금에게 호소한 끝에 3~4년 만에 재조사가 이뤄졌고, 그 결과 김조술이 처형당한다. 이때 김조술에게 적용된 죄목이 간범(겁탈), 무고 등과 함께 ‘위핍인치사’(威逼人致死)였다.
‘위핍인치사’는 조선에도 두루 적용됐던 중국법전 <대명률>에 나온다. 위협과 핍박으로 다른 이를 죽도록 한 죄이니 일종의 협박치사이지만, 박씨 사건처럼 간통이나 도적질을 했다고 헛소문을 내어 자살하게 한 행위도 이 죄로 다스렸다. 원인 제공자도 처벌하도록 한 조선시대의 응보적 행형 제도 때문이다. 형량은 장 100대와 장례비에 쓸 은 10냥이었다. ‘위핍인치사’는 조선시대 많은 여성 자살 사건에 적용됐다. 근대 사법제도 도입 직후인 1899년 10월 한성부재판소의 부녀자 김씨 자살 사건에서도 ‘위핍인치사’에 따른 처벌이 나온다.
물론, 지금 법으로는 그렇게 처벌할 수 없다. 최근 대법원은 분신 자살을 하겠다며 위협하는 여자친구의 옛 남자친구에게 라이터를 던져줘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된 남자에게 무죄 확정 판결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그 여자친구는 기소되지도 않았다.
경찰이 자살한 탤런트 최진실씨를 둘러싼 괴소문의 출처를 찾다 실패했다고 한다. ‘죽은 이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인지 또는 다른 의도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그 생각의 한 가닥은 멀리 조선시대에 걸쳐 있는 듯하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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