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2.25 21:03
수정 : 2008.12.25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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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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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1914년 7월23일, 오스트리아는 그해 6월 황태자 부부의 암살 사건과 관련해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용어도 거칠었지만, 내용도 반오스트리아 단체 해산, 오스트리아가 지목하는 관리의 파면 등 굴욕적이었다.
이는 의도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가 이를 거부할 게 분명하며, 그리되면 군사행동의 길이 열린다고 봤다. 세르비아는 시한에 맞춰 대부분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요구조건 하나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전쟁을 강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다.
거짓 최후통첩도 있다.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은 1956년 10월 파리 교외의 한 별장에 모여 음모를 짰다. 표적은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선언한 이집트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운하를 되찾으려 했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공군력을 무력화하고 싶었다. 세 나라의 작전은 이랬다. “10월29일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한다. 영국은 인명·선박 보호 구실로 운하를 재점령하고, 두 나라에 최후통첩을 낸다. 이스라엘은 받아들인다. 이집트가 거부하면 이집트 비행장을 폭격하고 상륙작전을 벌인다.” 제2차 중동전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과거 최후통첩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 서정의 전 현대건설 노조설립추진위원장의 <이명박 회장의 최후통첩 그리고 피랍>을 보면,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회장은 1988년 5월4일 서씨를 만나 노조 설립을 포기할 것을 종용하면서 “정 그렇게 나오겠다면 물리적 충돌밖에 없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틀 뒤 서씨는 폭력배한테 납치됐고, 나중에 회사 간부들이 이를 사주한 혐의로 기소됐다.
한나라당이 25일까지 쟁점 법안에 대한 타협이 안 되면 이를 강행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최후통첩이다. 최후통첩은 대부분 작용-반작용의 악순환으로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처음부터 대화와 타협은 기대하지 않는 최후통첩도 많다. 한나라당은 어떤 경우일까.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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