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1.14 20:37
수정 : 2009.01.14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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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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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1933년 2월27일, 베를린의 제국의회 의사당에 불이 났다. 네덜란드 공산주의자 마리뉘스 판 더르 뤼버가 방화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히틀러는 곧바로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공산주의 혁명의 위협을 막아야 한다며 비상통치권을 요구했다. 그 뒤의 일은 말 그대로 ‘속도전’이었다.
다음날인 2월28일, ‘민족과 국가의 보호를 위한 제국 대통령령’이 공포됐다. 언론·출판의 자유 등 헌법상 시민권이 정지됐고, 가택수색·도청 등이 허용됐다. 3월21일, 외교정책의 곤경을 초래하거나 정치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따위 ‘악의적 험담’은 사형에까지 처하도록 한 긴급법이 나왔다. 같은 날, 정치범죄는 보통의 법 절차에 따르지 않고 처벌하는 특별재판소법도 공포됐다.
3월24일에는 ‘민족과 국가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법’, 곧 수권법이 만들어졌다. 나치 정부는 헌법에 어긋난 법률도, 의회나 대통령의 동의 없이 만들 수 있게 됐다. 독재의 본격화다.
독재를 법적으로 정당화하는 데는 법률가들이 앞장섰다. 수권법을 ‘임시헌법’이라고 옹호한 법학자 카를 슈미트, 지도자(히틀러)의 명령은 국법의 필수적 조건에 구속되지 않는 긴급조처로 공포할 수 있다는 논리를 만든 나치당의 법률가 한스 프랑크, 정치범과 유대인 등의 사형 및 ‘절멸’ 절차를 ‘간소화’한 ‘피의 재판관’ 오토 티라크 법무장관, 게슈타포 등 정치경찰과 강제수용소를 정당화한 헌법이론가 베르너 베스트 등이 그들이다. 베스트는 “정부가 처리했으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을 처리하는 것이 ‘경찰’의 역할”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 한국에서도 나치의 형식적 법치주의를 연상시키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하긴, 의사당 폭력을 빌미삼은 국회폭력방지 특별법, 헌법적 권리를 침해하는 법안을 주도하는 법률가 출신 의원들, 정책 비판을 ‘험담’으로 여겼는지 인터넷 논객까지 잡아 가두는 검찰 등 비슷한 모습이 여럿이긴 하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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