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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2.23 18:49 수정 : 2009.02.23 20:47

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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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78살에 선출된 교황 요한 23세는 그저 평화롭고 착해 보이던 노인이었다. 그런 그가 취임 3개월 만에 공의회 소집을 선언하자 세계 가톨릭은 기겁했다. 공의회는 세계의 모든 주교들이 모인 가운데 교리와 규율과 전례 등을 검토하는 최고의사결정체다. 장구한 가톨릭 역사 속에서 단 스무 번밖에 열리지 않았던 터였다. 아무리 의욕적인 교황도 함부로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1962년 10월11일 공의회는 예정대로 열렸다. 전세계에서 모인 주교 2540명이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을 가로질러 베드로 성당으로 입장하는 장엄한 행렬을 세계인은 주목했다. 그렇게 개막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포괄하는 지역이나 주교단의 규모에서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됐다. 러시아 정교회, 콥트 교회,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등 다른 그리스도교 관계자도 옵서버로 초청됐다.

요한 23세는 소집 회의에서 공의회의 목표로 ‘아조르나멘토’를 제시했다. 그건 단순히 ‘현대화 또는 적응’이라는 뜻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고정불변인 것으로 여겼던 교리 해석과 표현, 전례, 규율, 사목 등에 대한 쇄신까지도 포함하는 것이었다. 요한 23세는 이를 위해 10개 위원회에서 보수적 교회법 전문가나 신학자들을 줄이고, 시대의 문제와 맞서 싸우던 현장의 주교들을 대거 포진시켰다.

다음과 같은 고백은 이 때문에 가능했다. “갈릴레오 사건을 일으킨 것은 잘못이다.” “16세기 교회 분열의 책임은 양쪽에 있다.” “분열 이후 일치의 노력에 등한히 한 것은 잘못이다.” “교회가 과거 종교의 자유를 침해한 것은 반(反)복음적이다.” 공의회가 채택한 4개 헌장, 9개 교령, 3개 선언은 이런 반성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1990년대까지 한국 가톨릭은 ‘아조르나멘토’에 충실했다. 그러면 지금은? 안타깝게도 부정적 여론이 우세하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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