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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11 18:52 수정 : 2009.03.11 19:39

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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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대법원이 처음으로 자기 집을 가진 것은 1935년이었다. 그 이전 146년 동안은 더부살이를 했다. 독립 초기엔 뉴욕 상업거래소, 필라델피아의 인디펜던스홀과 시청사를 떠돌았고, 1800년 워싱턴으로 옮겨온 뒤에도 의사당 지하의 어두컴컴한 사무실 한 칸과 책상 몇 개가 고작이었다. ‘파리처럼 품위 있는 수도’를 지향한 조지 워싱턴·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의 도시계획엔 연방법원 청사는 아예 없었고, 의회도 법원 청사를 지을 예산을 내어주지 않았다. 공간이 옹색하다 보니 대법관들은 방청객들이 보는 앞에서 법복을 갈아입어야 했다. 대법원은 의사당 확장 공사가 벌어진 1806년에야 상원 회의실로 사용되던 쾌적한 공간을 대법정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연방대법원이 지금 같은 권위와 권한을 확보한 것은 바로 그런 옹색한 법정에서였다. 대법원은 1803년 ‘마버리 대 매디슨’ 사건에서 법안에 대한 위헌심사권과 헌법 해석권은 연방법원에 있다고 판결했다. 미국 헌법은 위헌심사권이 어느 기관에 속하는지 명시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의회와 백악관은 이 판결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판결을 이끈 존 마셜 4대 대법원장은 1835년까지 재임하면서 어렵사리 ‘창설’한 대법원의 권한을 확고하게 굳혔다.

한국 대법원도 광복 50년 만인 1995년 서울 서초동에 지하 2층 지상 16층의 청사를 지어 이사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지금의 서울 서소문동 서울시립미술관 자리에 세워졌다는 최초의 근대적 재판소인 평리원의 2층 벽돌집이나, 1928년 일제가 그 터 4860평에 경성재판소로 건립한 옛 대법원 청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웅장하다. 그 청사의 7층에 집무실이 있는 신영철 대법관이 바로 아래층의 법원행정처장실을 오가며 지난해 서울중앙지방법원장 때의 촛불재판 간섭 행위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위풍당당한 청사엔 어울리지 않는, 권위 추락이다.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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