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5.04 18:51
수정 : 2009.05.04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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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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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록을 살펴보는 것은, 거대한 소용돌이를 향해 질주하는 배들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선원들은 제 항로가 정확하다고 확신하지만,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있다. 이미 거기서 수많은 배들이 난파했지만, 뒤따르는 배들은 그리로 내닫는다.” 5년 전 <미국의 잊혀진 대유행>을 펴낸 미국의 앨프리드 크로스비는 1918년 스페인 인플루엔자를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대유행이라고 개탄했다. 최악의 비극이었음에도 집단적 기억상실에 걸린 것처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8월부터 시작된 2차 감염으로 미국인은 무려 55만여명(크로스비의 추산은 65만여명)이 사망했다. 1차대전 사망자보다 10배나 많은 수치다. 뉴욕에선 한 주 동안에 9000여명이 죽기도 했다. 도시는 거대한 공동 묘지였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스페인 인플루엔자는 금방 잊혀졌다. 사람들은 이보다는 멀고 먼 중세 때의 페스트 대유행을 이야기하거나 한 세대 전의 디프테리아를 이야기하며 전율했다. 1920년 알래스카 오지에서 발생한 디프테리아로부터 20여명의 아이들을 구하는 데 기여했다며 개썰매의 리더견 발토의 동상을 뉴욕시 중앙공원에 세운 것은 이런 선택적 기억의 상징이다. 인플루엔자는 지금도 사망 원인 10위에 드는 유일한 감염성 질병이다. 게다가 변이가 심해 적절한 치료 방법도 못 찾고 있다. 재발도 잦다. 역사가 기억하는 대유행은 18~19세기만 5~10번이나 있었다. 1889년 유행 땐 유럽에서 25만여명이 죽었다.
크로스비는 그 원인을 잇따른 세계대전의 잔혹함으로 돌렸다. 그러나 <전염병의 문화사>의 저자 아노 칼렌은 발토의 예를 지적하며, 성공한 역사만 기억하고 실패한 역사는 외면하는 집단적 습관을 지적한다. 게다가 인플루엔자는 동물의 가축화와 가축의 공장식 생산에서 비롯된 만큼 정치나 자본과도 관계가 밀접하다.
곽병찬 논설위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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