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5.05 21:37
수정 : 2009.05.05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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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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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경찰의 시위진압과 관련해 ‘원천봉쇄’라는 말이 언론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5공 말기였다. 1987년 초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대규모 거리시위가 불붙기 시작하면서 다급해진 경찰이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시위진압 방식이 바로 이것이었다. 집회 장소를 아예 차단해 집회를 열지 못하게 하는 전략은 그 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신종 시위대처 방법이었다. 사실 그 전에는 시위가 산발적·기습적이었고, 장소도 주로 대학 구내 등으로 국한됐기 때문에 이런 방식까지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87년 2월7일 열린 ‘고 박종철 범국민 추도회’의 경우, 대회 장소인 서울 명동성당 주변에만 53개 중대 병력이 겹겹이 에워쌌고, 근처 버스정류장 20여곳이 폐쇄됐다.(6월민주항쟁기념사업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발간 <6월항쟁을 기록하다>) 경찰이 원천봉쇄를 결정하면 집회 예정지 주변의 지하철역에서는 열차가 아예 서지 않고 통과해버려 애꿎은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삼중차단, 검문검색, 압수수색, 가택연금, 불법연행, 해산작전, 분산수용 등의 단어가 난무했다.
원천봉쇄식 시위진압 방식은 따지고 보면 경찰이 ‘세 불리’를 자인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람이 구름 떼처럼 모이는 것을 막을 명분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 집회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이 ‘싹쓸이’라는 졸렬한 방법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시위진압 방식이 한동안 뜸했는데, 최근 촛불시위 한 돌을 맞아 다시 등장했다. 하지만 집회를 원천봉쇄한다고 해서 사람들의 희망과 염원까지 봉쇄되지 않는다는 것은 지난 역사가 증명한다. 촛불을 막는다고 ‘생각의 불씨’까지 사그라들지는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국정운영 방식의 ‘원천쇄신’인데, 이런 단순한 진리를 지금의 위정자들이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하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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