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5.20 22:16
수정 : 2009.05.20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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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현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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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조선왕조실록>에는 ‘죽창’이 몇 차례 등장한다. “상(임금)이… 명하여 진법을 익히게 하였다… 총 100여명이 우전(날개 달린 화살)과 죽창을 가지고 치달리고 쫓으며 때리고 찔러…”(1467년, 세조 13년). “함평 백성 정한순이 도당을 불러모아 기치를 세우고, 각기 죽창을 가지고 동헌으로 난입하여 현감을 끌어낸 다음…”(1862년, 철종 13년).
앞의 죽창은 엄연한 병기다. <무예도보통지>는 ‘죽장창’(竹長槍)이 20자(6m가량) 길이의 대나무로 만든 창으로 그 끝에 4촌(12㎝가량)의 엷은 날을 붙인다고 설명했다. <연려실기술>에는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이잠과 김준민 등이 화살이 다하자 죽창으로 왜병과 맞서 싸우다 죽었다고 쓰고 있다. 뒤의 죽창은 조선 후기 학정에 반발해 일어난 민란에서 나온 것이다. 끝 부분만 날카롭게 잘라 만든 원시적 무기로, 관군의 병장기에 맞섰던 농민들로선 나름의 자위 수단이었을 것이다.
지난 16일 민주노총 집회에서 죽창이 사용됐는지를 놓고 논란이 거세다. 경찰은 계획적 ‘죽창 시위’라고 못박았지만, 민주노총은 ‘만장 깃대’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낫으로 자르다 보면 그리되는 경우도 있다지만, 끝이 비스듬하게 잘린 대나무도 일부 발견됐다고 한다.
이를 두고 이명박 대통령은 “시위대가 죽창을 휘두르는 장면이 전세계에 보도돼 한국 이미지에 심한 손상을 입혔다”며 엄정 대처를 지시했다. 그가 말한 ‘죽창’이 인마 살상용 병기를 뜻한다면 지나친 과장이다. 민란의 죽창이라 해도 위험한 ‘상징 조작’이다. 죽창까지 들 뜻이 없는 국민을 자칫 토벌 대상으로 몰아붙이는 결과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달리 보면, 죽창 운운은 일부일지라도 국민의 반발이 민란 수준에 가깝다고 자인하는 꼴일 수 있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의 구속처럼 그런 게 더 심한 ‘국가 이미지 손상’ 아니겠는가.
여현호 논설위원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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