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5.28 23:10
수정 : 2009.05.28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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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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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화장해라.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죽음은 소멸이다. 화장은 그 소멸을 더욱 극대화한다. 육신은 연기와 함께 한 줌의 재로 남고, 육체로 산 모든 것들은 무(無)로 환원된다.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은 땅으로 내려온다는 믿음이 있다. 죽음을 ‘혼백의 해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풍수지리학에서는 ‘백’은 죽은 이의 뼈에 붙어 있다고 여기는데, 화장은 그 뼈까지 모두 태운다.
비석은 이 세상을 살다 간 표지이다. 비록 육신은 세상에서 사라져도 그 한 모퉁이에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인간 심리의 반영이 비석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뜻과 발자취는 돌에 남아 세월의 풍화를 견디며 후세로 이어진다. 화장과 비석은, 소멸과 영생 사이의 아득한 긴장을 유지한다. 비석 앞에 놓인 ‘작은’이라는 수식어가 애달픔을 더한다.
비석에 새겨지는 글이 묘비명(墓碑銘)이다. 서양에서는 ‘에피그램’이라는 문학 장르로 발전하기도 했다. 고인 스스로가 미리 묘비명을 써놓은 경우도 적지 않다. ‘썼노라, 살았노라, 사랑했노라’(스탕달),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니코스 카잔차키스) 등은 자주 인용되는 명문 묘비명들이다. ‘자기보다 현명한 사람을 주위에 모이게 하는 법을 터득한 자 이곳에 잠들다’(앤드루 카네기), ‘야구 역사에 한 줄기 빛을, 자신의 삶에 한 움큼 어둠을 남기고 떠난 외로운 영혼, 여기에 잠들다’(타이 코브) 등의 묘비명도 울림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는 어떤 묘비명이 어울릴까. 이름 없는 수많은 시민들이 분향소 주변의 대자보판, 또는 인터넷 등에 올리는 글들 하나하나가 모두 묘비명으로 써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어찌 보면, 노 전 대통령의 묘비명은 사람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 이미 새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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